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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ontributor.author송보영-
dc.creator송보영-
dc.date.accessioned2016-08-25T11:08:55Z-
dc.date.available2016-08-25T11:08:55Z-
dc.date.issued1997-
dc.identifier.otherOAK-000000025428-
dc.identifier.urihttps://dspace.ewha.ac.kr/handle/2015.oak/187420-
dc.identifier.urihttp://dcollection.ewha.ac.kr/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0025428-
dc.description.abstract이 논문은 미군정기의 식량 부족 상황을 매개로 하여 군정이 실시하였던 식량 통제 정책이 어떠한 의도에서 실시되었는지를 검토해 보고, 군정의 그러한 식량 통제 정책이 실시됨에 있어 가장 큰 희생자였던 농민은 어떠한 저항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미군정 시기의 식량 문제는 군정의 정책적 효율성과 존립의 안전성을 가늠하는 핵심적 문제로 인식되었다. 식량정책은 농민들로부터 보유곡을 일정량 구매하여 비경작자들에게 배급하는 방식이었으며, 이러한 방식에도 불구하고 배급용 비축 식량의 부족으로 외국으로부터의 도입곡에 의해 부족분의 식량이 충당되었다. 이러한 식량정책은 정부라는 중간, 최종매개체를 통해 곡물수집과 배급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에서 국가의 통제기제가 작용하고 있으며, 식량문제가 식량의 공급자와 소비자, 식량수집과 배급이라는 양 축을 구분하여 살펴볼 필요성이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두 단면의 분리와 비교가 가능한 것과 동시에 이들 양자간의 공통점 또한 발견된다. 주요한 식량 공급자인 농민들이 곡물 수집의 대상으로서 수집시 일정한 저가용 식량과 종자용 식량의 비축을 정책적으로 용인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식량공급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식량배급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는 사실에 있다. 미군정은 농민을 곡물 수집령이라는 정책을 통해 통제하려 하였으며, 도시 부문은 식량의 원활한 확보를 통해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동안의 식량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연구들은 식량배급의 문제와 식량공출시의 비합리성과 가혹함에 주로 논의의 초점을 맞추어 왔다. 특히 식량정책이 가지고 올 결과라는 측면에서 정책적 의의를 찾고 있다. 즉, 도시 노동부문의 불안정성이 식량수집과 배급이라는 통제정책을 야기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부문의 불안정성은 미군정에게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좌익 세력과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미군정이 진주하기 이전에 이미 좌익 세력은 해방 공간에서 정치적 조직력과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좌익 세력은 정국의 주도권을 가지고 식량 통제와 관리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에 미군정은 좌익 세력이 도시의 사회적 인구 증가가 계속되는 불안정한 상황을 이용하여 사회적 혼란의 원인이 되지 않도록 좌익 세력의 식량 통제 노력을 미곡의 자유 시장을 설치함으로써 박탈하였다. 그런데, 미곡의 자유 시장을 비롯한 자유 시장은 설치한지 한달 여만에 실패했고, 군정은 미곡 통제령을 시작으로 식량 통제 정책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군정의 식량 통제 정책은 미곡 자유 시장의 실패를 원인으로 하여 등장한 것이기는 하지만, 군정은 경제 정책의 입안 과정에서 이미 식량 통제 정책의 실시 문제를 고려하고 있었다. 군정의 식량 통제 정책은 이미 진행 중이던 조선화 정책과 46년 5월에 공포한 경제 통제령에 의해 그 틀을 잡아갔다. 경제 통제령이 의미하는 바는 군정이 식량 통제 정책을 효율적으로 실시한 제기구를 한국인에 의해 집행되도록 하였다는 사실에 있었다. 군정이 식량 통제 정책을, 특히 농민의 효율적인 통제를 위해 설치한 기구는 경제 통제령에 의해 설치된 중앙 식량 행정처, 신한공사 그리고 입법의원이었다. 중앙 식량 행정처와 신한공사가 곡물을 수집하는데 있어 행정, 집행의 업무를 맡았다면 입법의원은 수집 법안을 제정하는 입법 기구의 역할을 하였다. 이들 기구는 농민들을 곡물 수집령을 통해 군정의 정책 하에 유인하는데, 유화적, 강제적 조처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통제 기구를 통해 미군정은 농민을 한국인에 의해 간접 통치함으로써 군정 정책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농민들의 감정을 희석하는 한편, 군정 정책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이들 기구 중 특기할 기구는 입법의원이었다. 입법의원은 과반수가 넘는 우익 경향의 인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의 입안 내용은 영세농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입안 내용은 소속 정당의 정책 기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군정청과 입법의원의 대립과정에서 나타나는 입법의원의 모습은 우익 정당의 보수성을 벗어나 긍정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입법의원은 농민 관련 법안을 제정하면서 군정청과 군정청이 지정한 통제기구와 마찰을 빚어 군정청이 의도하는 바의 실질적 통제 효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국인 입법 기관이 농민의 법령을 제정하고 있다는 명목적인 사실만으로도 군정은 입법의원을 방패 삼아 식량 정책의 실패나 곤경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군정의 통제 기제에 대하여 각 정치 세력은 식량 통제권의 확보나 그로부터 야기되는 경제적 이익에 관심을 갖았다. 좌익 세력은 박탈된 식량 통제권의 회복에 관심이 있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신전술’ 이후 군정의 식량 정책, 특히 곡물 수집령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로 선회하게 된다. 우익 세력은 10월 항쟁 이후 지속적으로 미곡의 자유 시장을 요구하였고, 이를 통해 경제적 이윤을 창출할 기회를 얻으려 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에 의해 이러한 기회가 차단 당하자 미곡 통제 기구에 참여하려고 하였다. 또한 입법의원을 통해 곡물 수집령 폐지를 주장하면서 영세농 보호 입안에 동의하는 입장으로 보였다. 우익 정당의 이러한 입장은 경제적 이윤 창출의 제도화가 어렵게 되자, 농민을 자신들의 지지 세력으로 확보하기 위해 친농민적 정책을 추진하는 정치적 성격을 띠었다. 농민들은 10월 항쟁과 47년 하곡 수집을 통해 미군정의 식량 통제 정책에 적극 반대하였다. 이러한 반대는 농민 독자적인 힘에 의해 이루어지기보다 좌익 세력의 선동과 영향력 하에 이루어졌다. 특히 10월 항쟁 전과 진행 과정 속에서는 가시적인 좌익 세력의 영향력을 받았다. 그러나, 47년도 하곡 수집에서는 이원적인 행동 양식을 보여주었다. 46년 10월 항쟁은 남한 최대의 소요로 평가하면서 그 동원 매개체인 좌익의 영향력을 중시하였던 기존의 논의와는 달리 47년도에서는 여전히 농민들의 저항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저항의 움직임은 46년도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46년도의 농민 운동이 도시 부문의 식량난과 결합하여 전국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47년도의 농민 운동은 지역적이고 분산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47년도 하곡 수집 반대 운동이 미군정 농민 정책에 대한 반대를 적극적으로 표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편으로 농민들은 이러한 반감을 표출하기 보다 미군정 농민 정책으로 수렴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한 현상의 이유는 농민들에게는 해방 이후부터 논의되어 온 농지 개혁의 요구가 미군정 말기 귀속농지 불하를 통해 일부 실현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농지 개혁 논의가 계속 진행되는 과정에서 소작지를 방매한 지주의 개인 소유 농지를 구매함으로써 농지 소유의 열망을 실현하려 하였다.;This study analyzed the Food Control Policy enforced by the American Militttaary Government(AMG) in Korea because of the lack of food situatiod in1945. 11-1948. 8 and farmers who were the victims of the Food Control Policy expressed what kind of proterd movement. The problem of lack of food was regard as menacing the core factor of systematic stability. AMG carried the Food Control Policy purchasing farmer's retained rice and distributing to non-cultivator in the city into the effect. But lack of reserved ricebrought about importing grains from foreign country, mostly from USA. Likewise the Food Control Policy was enforced through mediation of system of AMG. That means it is important to understand AMG as a food control mechanism. AMG wanted to control farmers enforcing grain collection and to stabilize the city supplying food to city inhabitant. In taking issue on the food problem, existing studies have took the focus on distibuting food and severity of grain collection, especially outcome of food policy. Namely, unstability of labour factor in the city causes the food control policy-grain collection in rural sector, food distribution in urban sector. But it is important to understand the relation among AMG, leftists, farmers as food-producers and food customers in the city. Before AMG landedd in Korea, the leftists already had taken nationwide political initiatives. The leftists having political leadership took charge of controling and managing food. But beginning with free market in rice free market had failed, AMG began to enforce the food control through grain collection program. The food control program was shown in failing free market in rice, but it was considered at first stage when AMG made an economic policy. AMG established some apparatus which were National Food Administration, New Korea Company and Interim Legislative Assembly. AMG let these apparatus execute the food control policy, using these apparatus AMG intended to enforce food control by Korean administarator indirect way. Especially these apparatus made use of appeasement or sanction in order to support AMG food control. ON the other hand, political parties were interested in securing food control right their own or creating economic surplus. The leftist were concerned about recovering food control right. But go contrary to their wishes, They directed 'New Tactics' and objected to AMG's food control program. The rightist parties continuously claimed re-establishing free market in rice, wanted to make economic interests. Farmers protested against grain collection program during occupation. This protests were made under leftist agitation and instruction. The revolts in 1946. 10 outbroke nationwidecombined withfood shortage in the city, protests about summer grain collection in 1947 occurred at the local level and showed dispersed characteristics. Summer grain collection in 1947 farmers showed dualistic behaviour pattern. Some of farmers objected the grain collection program, and another followed AMG agricultural policy. Obeying AMG's policy, farmers wanted to realize the desires which they owe their own land.-
dc.description.tableofcontents목차 = ⅳ 표차례 = ⅴ 논문개요 = ⅵ 제1장 서론 = 1 1. 연구 목적과 연구 방법 = 1 2. 기존 논의 검토 = 6 제2장 해방 이후 한국 농촌의 사회 경제적 상황 = 16 1. 해방 초기 농민의 경제적 요구 = 16 2. 전농을 중심으로 한 좌익 세력의 영향력 = 20 제3장 미군정의 식량 통제 정책 = 26 1. 미국무성에 대한 경제 정책 = 26 2. 자유 시장 정책의 실패와 식량 통제 정책의 실시 의도 = 30 3. 미군정 법령에 의한 곡물수집 정책 = 46 1) 곡물 수집령과 시기별 수집령의 특징 = 47 2) 행정 기구 설치를 통한 간접 통제 방식 채택 = 54 3) 식량 수급 방식 = 67 제4장 미군정기 농민정책에 대한 각 세력의 반응 = 73 1. 식량 정책에 대한 좌,우익의 입장 변화 = 73 2. 미군정기 대농민 정책에 대한 농민의 저항 = 85 1) 법령 105호의 공포와 식량 통제 정책의 강화 = 85 2) 46년도 미곡 수집 반대 운동 = 89 제5장 결론 - 미군정기 식량 통제 정책의 특징과 농민 운동의 성격 = 96 도움받은 글 = 106 ABSTRACT = 110-
dc.formatapplication/pdf-
dc.format.extent5680141 bytes-
dc.languagekor-
dc.publisher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c.subject미군정기-
dc.subject식량 통제-
dc.subject농민 운동-
dc.subjectFood Control Policy-
dc.title미군정기 식량 통제 정책과 농민 운동 연구-
dc.typeMaster's Thesis-
dc.title.translated(A) Study of the Food Control Policy and Farmer's movement under the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dc.format.pageviii, 111p.-
dc.identifier.thesisdegreeMaster-
dc.identifier.major대학원 정치외교학과-
dc.date.awarded199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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