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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 國交正常化 反對運動과 朴正熙 政府의 對應樣式에 관한 分析

Title
韓·日 國交正常化 反對運動과 朴正熙 政府의 對應樣式에 관한 分析
Other Titles
(A) Study on the Opposite Movement to Normalization of Relations between Korea and Japan and the Cunfrontation Mode of Park Jeung-Hi government
Authors
權珍姬
Issue Date
1995
Department/Major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Keywords
한일 국교정상화반대운동박정희 정부정치외교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이 글은 박정희정부에 의해 주도되었던 한·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국내의 반대 운동과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양식을 상호연관지어 고찰하는데 목격이 있다. 1952년 '주일연합군총사령부(Supreme Commander of the Allied Powers)'의 주선하에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이 최초로 개최된 이래로 한일양국은 수차례에 걸친 교섭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합의에도 도달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한일회담이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하게 된 이유로는 무엇보다도 먼저 식민지경험을 통해 형성된 양국간의 특수한 관계를 지적할 수 있다. 즉, 한국의 일본에 대한 적대감과 일본의 한국에 대한 우월감이 양국 국민의 일반적인 정서로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에 한·일 국교정상화 문제에는 양국 국민의 지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또한 한국의 이승만정부는 국교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서 과거역사에 대한 일본의 사과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원칙을 견지하고 있었던 반면 일본정부는 한·일 국교정상화를 양국간의 미래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협정으로 간주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양국 정부와 국민의 근본적인 견해차이로 인해 미국의 지속적인 중재에도 불구하고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협상은 그 타결의 실마리를 만들어 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적 상장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미국은 對共防衛를 위한 동북아정책의 일환으로 이미 1940년대말부터 한·일간의 화해를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1960년대에 들어서 베트남문제와 自國내의 경제상황의 악화로 인해 양국의 화해가 긴급한 과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1950년대 중반이래로 고도성장을 이룩하고 있었으나 1960년대에 들어서 과잉생산에 따른 경제적 불황이 야기되었다. 따라서 일본은 새로운 해외시장과 자원을 개척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한국에서는 1961년 5월에 발생한 군사쿠데타로 박정희 정부가 등장하였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면 박정희는 일본식 교육을 받고 성장한 일본군인 출신으로서 일본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박정희정부는 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제성장'을 목표로 삼고, 수출과 외국자본에 의존하는 경제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대한원조가 1958년이래 매년 감소됨에 따라 정부는 자본의 새로운 공급원을 확보할 필요를 느꼈으며 그 대안으로서 등장한 것이 바로 일본이었다. 따라서 '한일국교의 조속한 타결'을 위해 박정희정부는 기존의 모든 원칙을 버리고 협상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조급한 태도는 한국국민의 의혹을 불러일으켰으며, 특히 4.19이후 크게 성장한 학생세력은 이같은 방식을 '굴욕회담'으로 단정지었다. 1964 년부터 1965년까지 전개된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운동은 이러한 비판의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학생들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의 명확한 반성이 없이는 평등한 한일관계가 수립될 수 없다고 보았으며, 일본자본의 도입에 따라 한국이 경제적으로 일본에 예속화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반대논리에 기반하여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민족주의를 발견하고, 민족자본에 바탕을 둔 자립경제를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박정희정부는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군이나 경찰력의 동원과 같은 물리력의 행사뿐만 아니라 중앙정보부나 일반 행정기구를 통한 억압도 시도하였으며 새로운 법을 제정하여 반대세력의 활동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박정희정부는 5·16이래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오던 반공안보논리와 경제성장론 그리고 '민족적 민주주의론'에 기반하여 '한일국교의 조속한 타결'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결국 군사쿠데타로 출발하여 정통성의 기반이 미약한 박정희정부에게 있어서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운동은 최초의 정치적 위기임에 분명하였다. 그러나, 박정희정부는 다양한 대응방법의 효과적인 동원을 통해 반대운동을 진압하였다. 또한 '한일 국교의 조속한 타결'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가지고 있었던 여타의 논리들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일 국교정상화문제를 둘러싼 당시의 상황에 대한 단순한 이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이후 한국정치사의 전개를 검토함에 있어서 중요한 시각을 제공해주고 있다. 즉,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운동을 억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박정희정부는 정치적 저항운동에 대처하는 대응논리와 방법을 획득·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이것이 곧 박정희정부의 지배양식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ne opposite movement to normalization of relations between Korea and Japan and the confrontation mode of Park Jeung-Hi government In 1952 the Korean-Japanese conference for the 'normalization of relations' was firstly held by the good offices of 'Supreme Commander of the Allied Powers'. Repeated negotiations, thereafter, could not reached an mutual agreement. The experience, that Japan colonized Korea, formed the unusal relations of two nations, was first and foremost reason of repeated rupture of conference. The peoples of Korea and Japan were greatly concerned about the 'nomalization of relations' because of the spread feelings of each nation; Korea's hostility against Japan and Japan's superiority complex over Korea. There was another discrepancy. On the one hand, 'Rhee Sung Man gov't' in Korea stuck to the principles that the nomalizatin was preceded by the reflections of Japan t o the past history between two nations. On the other hand, the Japanese government considered the nomalization of relations as normal treaty to the future relations of two nations. Such a discrepancy played a negative role in negotiations for the nomalization of relations, and impouverished arbitration of United States. Then there was change about internat'l situations of Korean peninsula around 1960's. Most of all, foreign policy of United States Changed. Since late 1940's U.S. sought the reconciliation between Korea and Japan in terms of Northern-East security policy for anti-communism, after 1960's, considerd the reconciliation as urgent task because if Vietnam and poor economy of U.S. Japan showed the changes of conditions, too. Since middle of 1950's Japan had grew up highly, after 1960's, fell into depression by overproduction. 'Park Jeung Hi government' formed by the military coup d'etat in May, 1961. Park had a hospitable impression for Japan because he came from japanese-educated soldier. 'Park government' aimed 'economic development' for political legitimacy, and planned the economic strategy dependent on export and foreign capital. But the aids of U.S. to Korea decreased as years went by after 1958. This made 'park government' concentrated the negotiaton for the "fast settlement of conference", did not stick the principles any more. But the haste of Government attitude provoked the suspicious of Korean peoples. Especially the student power, who grewed after 4.19, judged this foreign policy 'a humiliating conference'. Anti movement to 'nomalization of relations between Korea and Japan' originated these sense, deployed from 1964 to 1965. The students thought that equivalent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japan never accomplished, for lacked the earnest reflection of japan to the past colonial control. They urged that Korea would become economically surbordinated to Japan by the acceptance of Japanese capital. On this logic of opposition, they insisted on the disclose of true nationalism and achievement of autarky on the basis of national capital. 'Park government' mobilized the various method to cope with the anti-nomalization movement. It tried to not only use army or police forces but also oppress through the CIA or administrative apparatuses. It even enacted the new law to obstruct the act of opposite power. 'Park government' emphasized "the fast settlement of conference" by the terms of several principles: the logic of anti-communism security developed after 5.16, of economic growth and of 'National Democracy'. After all, the anti-nomalization movement hit the 'Park government' which had a fragile legitimacy due to starting off with military coup d'etat. It was clear that the anti-nomalization movement was first political crisis to 'Park government'. But 'Park government' put down the movement by the effective mobilizing of various countermeasure. What was more, it could developed and elaborated counter logics in explanation of the reason that the conference should settled fastly. All these facts give some crusial perspectives in reviewing the future of political history in Korea. These were not to merely point out the simple appreciations of political situations around the nomalization issue. As a whole, the oppression of anti movement to 'nomalization of relations between Korea and Japan' made 'Park Jeung Hi government' developed the countermeasure and counter logic to the political struggle, and this turned to governing mechanism of 'Park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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