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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美術展覽會』 四君子畵 硏究

Title
『大韓民國美術展覽會』 四君子畵 硏究
Other Titles
A Study on the Four Gentleman Paintings in the Korean Art Exhibition : focus on the orchid and bamboo
Authors
김아영
Issue Date
2010
Department/Major
대학원 미술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dvisors
홍선표
Abstract
본 연구는 四君子畵에 대한 시대적 담론을 바탕으로 근현대 사군자화의 인식경향을 살펴보고, 大韓民國美術展覽會(이하 국전) 사군자화 작품 분석을 통해 朝鮮美術展覽會(이하 조선미전) 사군자화 양식이 어떻게 계승되고 변화되었는지 그 양식 계보를 정리하여, 해방 이후 관전양식으로서 사군자화의 특징을 규명하려는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조선말기 남종문인화의 유행과 閭巷文人에 의한 사군자화 제작이 보편화된 결과 사군자화는 개화기 창작물의 대종을 이루게 되었으나, 근대기 書畵分離의 과정을 거치면서 書壇과 공존하게 된 사군자는 해방 이후 국전 서예부에 속하여 공모됨으로써 점차 서예와 동일시되고 마치 회화의 입문과정처럼 받아들여지게 된다. 본고에서는 근대기 서화분리와 미술개념의 도입에 따른 근현대 사군자화의 인식을 해방 이전과 해방 직후로 시기를 나누어서 고찰하였다. 먼저 근대기의 제도적 서화분리의 첫 시도로써 조선미전 창설시 사군자화는 東洋畵部에서 공모되었다. 그러나 3회부터 書部에 편입되는 한편, 5회에 이르면 서·사군자화에 대한 공식적 반론이 조선미전과 관련하여 제기되는데, 조선미전 사군자 폐지론은 시간이 흐르면서 四君子 無用論, 四君子 非美術論으로까지 확대되었다. 11회때 서부가 폐지되자, 사군자화는 다시 동양화부에 재편된다. 연이어 다음해 사군자화는 대거 낙선하는 등 입선작 수가 급감하였고, 1935년부터 조선미전에서 그 자취를 찾아 볼 수 없게 된다. 이에 따라 조선미전에서 소외된 사군자는 書壇과 공조하여 1939년 朝鮮書道展覽會 등 별도의 전람회를 개최하면서 부흥을 도모하였다. 해방 직후 미술계에 있어서 최대 당면과제는 새로운 민족미술의 수립이었으며, 이 시기 사군자화는 비교적 이론과 조직이 강했던 좌파 미술가들에 의해 민중이 공유할 수도 향유할 수도 없는 예술지상주의적인 미술로 청산되어야 할 봉건적인 잔재로 담론화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군자화는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書藝部에 속하여 공모되며 다시 공식적인 창작 발표의 장에서 부활하게 된다. 이것은 국전이 반공이데올로기를 지닌 이승만 정권하에서 국가적 차원의 미술정책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전을 통해 사군자화는 서예와 동일시됨에 따라 정체성을 잃고 그 가치는 더욱 폄하되고 만다. 국전에서도 서예는 미술이냐, 아니냐를 놓고 끊임없이 논란이 일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서예와 결합하여 서예부에서 서예와 함께 공모되었던 사군자화는 서예와 더욱 공고하게 결합해 갔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결국 근대기 서화분리의 과정을 거치면서 조선미전에서 소외되었던 사군자는 재도약을 위해 서예와 결합하여 국전에까지 이르게 되지만, 위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미술’의 외곽으로 밀려나며 서예와 동일시 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근대기에 들어서면 ‘蘭竹’이라는 용어가 사군자를 대체하며 보통명사화 될 만큼 사군자화는 墨蘭, 墨竹 두 화목에 집중되고 있으며, 국전 사군자화 역시 墨蘭, 墨竹이 출품작의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墨蘭畵와 墨竹畵의 양식을 분석하였다. 묵란화와 묵죽화의 양식계보를 통해, 묵란화의 경우 조선미전의 대표적인 묵란화 양식이었던 金應元의 小湖風 墨蘭畵와 閔泳翊의 芸楣風 墨蘭畵, 국전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인 許百鍊의 毅齋風 墨蘭畵와 張遇聖의 月田風 墨蘭畵를 중심으로 화풍이 전개되고 있음을 본다. 소호풍 묵란화와 운미풍 묵란화 양식은 주로 구도면에서 연관을 가지고 계승되었으며, 소호란의 석란 2단구도는 다른 계보의 작가들에게도 차용되어 크게 유행하였다. 의재풍 묵란화는 허백련과 사제관계에 있었던 주로 호남지역의 작가들이 따랐으며, 국전 묵란화 양식의 주류를 이루었으나 고착화된 양상을 보였다. 월전풍 묵란화는 특별히 그의 제자인 金蕙培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에게 수용되어 애호 받았다. 묵죽화에 있어서는 조선미전의 대표적인 묵죽화 양식이었던 金圭鎭의 海岡風 墨竹畵와 徐丙五의 石齋風 墨竹畵, 그리고 국전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인 許百鍊의 毅齋風 墨竹畵로 그 화풍이 형성된다. 해강풍 묵죽화풍의 경우 특히 新竹의 표현에 있어 유사성을 가지고 계승되었으며, 주로 李秉直에 의해 가장 많이 재현되었다. 金君枝, 朴根述 등은 서병오의 제자인 徐東均으로부터 묵죽화법을 전수받아 석재풍 묵죽화를 그렸다. 의재풍 묵죽화는 묵란화와 마찬가지로 호남지역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洪信杓와 朴幸甫는 의재의 묵죽화법를 기본으로 자신들만의 묵죽화풍을 생성해내었다.;As a result of making the four gentleman paintings by the middle class scholar(閭巷文人) at the end of the Chosun Dynasty, the four gentleman paintings were majority creations of new opening period. Up till now the four gentleman paintings have been researched in many studies, but there was no research on the four gentleman paintings of contemporary period. That's why that people distinguished between calligraphy and painting in modern period then the four gentleman paintings could coexist with the group of calligrapher. Also the four gentleman paintings belonged to the Korean Art Exhibition, it regarded as same as calligraphy. This research focus on knowledge trend of the four gentleman paintings. Through style analysis of the four gentleman paintings in the Korean Art Exhibition, I tried to discuss special features and distinguishing marks of the four gentleman paintings after Independence Day of Korea. At the establish period of Chosun Art Exhibition, the four gentleman paintings belonged to the part of Oriental painting, but it belonged to the part of the calligraphy since the 3rd contest. From the 5th contest, there was call in questions about abolition of the four gentleman paintings in Chosun Art Exhibition. As abolition of the part of the calligraphy at the 11th contest, entries of the four gentleman paintings reduced extremely. Therefore the four gentleman paintings with the group of calligrapher were opened exhibition separately and planned ahead reconstruction. Right after Independence Day of Korea, it was an urgent problem to establish new national fine arts in art association. At that time, the artists of left wing considered the four gentleman paintings as conservative vestige that should be liquidated. Nevertheless, the four gentleman paintings was belonged to the 1st Korean Art Exhibition in 1949. That's why that the Korean Art Exhibition was made by rightest government which had an anticommunism ideology. However, the four gentleman paintings lost its identity and value by regarding as same as calligraphy in the Korean Art Exhibition. In the Korean Art Exhibition, the calligraphy evoked much controversy that was art whether or not constantly. In my opinion the four gentleman paintings would combine with the calligraphy stronger in this juncture. At last the four gentleman paintings combined with the calligraphy reached the Korean Art Exhibition, but I intend that the four gentleman paintings was considered as same as calligraphy through this process like above. The orchid paintings and the bamboo paintings of the four gentleman paintings were painted frequently not only in modern period but also in the Korean Art Exhibition. Accordingly I tend to analysis style of the orchid paintings and the bamboo paintings in this research. Through style analysis, the orchid paintings were divided by four groups- 小湖風 墨蘭畵, 芸楣風 墨蘭畵 were representative style of Chosun Art Exhibition and 毅齋風 墨蘭畵, 月田風 墨蘭畵 were new style of the Korean Art Exhibition. The bamboo paintings were divided by three groups- 海岡風 墨竹畵, 石齋風 墨竹畵 were representative style of Chosun Art Exhibition and 毅齋風 墨竹畵 was new style of the Korean Art Exhibition. In addition, I placed emphasis on important painting works and prominent pain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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