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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 리치와 交流한 漢人士大夫에 대한 考察

Title
마테오 리치와 交流한 漢人士大夫에 대한 考察
Authors
한연정
Issue Date
2000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본 논문은 明末 淸初 시기 東洋과 西洋의 문화 교류에 있어서 西學의 中國 傳來에 대한 중국 측의 반응이라는 측면을 고찰하기 위해 明末 萬曆年間(1573-1619)에 중국에 와서 활동하였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와 만난 漢人士大夫에 대해 살펴보았다. 리치와 만났던 한인사대부들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당시 서학전래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리치와 만났던 한인사대부들의 분석을 통해 당시 어떠한 계층이 서학에 관심을 가졌고, 수용에 긍정적이었는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마테오 리치는 中國에 카톨릭을 傳敎하기 위해 한인사대부들의 지적인 관심을 유도할 목적으로 천문학, 수학, 지리학 등 서양의 과학을 소개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많은 인물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리치는 전교방식에 있어 적응주의적 방식을 채택하여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의 생활양식과 문화에 대해 이해하도록 하였으며, 선교사들이 儒學을 공부하게 하였고, 가톨릭을 설명하는데 유교적 도덕관에 부합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런 입장에서 리치는 카톨릭이 유교를 보완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佛敎와 道敎를 이단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른바 ‘補儒易佛’을 주장하며 불교와 도교에 대해 비판하였다. 리치가 많은 지식인들과 만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리치의 활동에만 의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의 필요와 서학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문화적인 배경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萬曆 年間 東林黨 인사들은 유교의 전통적 가르침이 붕괴되고 있다고 생각하여 전통적 가치의 회복을 주장하며 각종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內閣과 첨예한 논쟁을 전개하였다. 동림당은 朱子學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주관적 관념체계를 중시하는 陽明學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만력 년간에는 양명학 좌파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좌파는 불교와 도교를 유교와 같은 종류의 ‘道’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양명학의 心學的 입장에서 불교와의 연관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으며 이런 영향으로 유교, 불교 도교의 三敎兼修를 주장하는 사상도 등장하여 사상계의 한 흐름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 혼란했던 정치상황으로 인해 經世致用的 관심을 가진 사상도 존재하여 실재적인 학문에 관심을 보이고,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적 다양성과 포용성으로 인해 중국인들이 서학을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리치는 많은 한인사대부들과 만남을 가질 수 있었는데 리치의 중국활동 시기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리치가 1593년 중국에 들어오면서부터 韶州를 떠난 1595년까지의 시기로 肇?,韶州에서 거주하면서 전교의 기반을 건립하던 시기이다. 두 번째 시기는 1595년 南昌정착부터 1601년 北京정착 이전까지의 시기로 南昌, 南京에 머물면서 리치는 서양과학에 대한 지식과 저술 등을 통해 얻은 학자로써의 명성, 안정된 전교방침 등으로 인해 많은 한인사대부들과 만날 수 있었다. 세 번째 시기는 1601년 北京 거주부터 1610년 리치의 사망까지로 리치는 북경에 머무는 것을 허가받고, 북경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중국 전교에 대한 전면적인 성과를 얻는 시기이다. 리치와 만난 인물들의 분석을 통해 어떤 계층의 사람들이 리치와 서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리치와 만남을 가졌는지를 고찰하여 서학전래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응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리치와 만난 인물들은 리치와 만난 지역, 출신지, 관직에 따라 분류할 수 있으며, 서학에 대한 반응의 정도에 따라 서학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인물, 부정적 반응을 가진 인물, 단순히 친분관계를 유지한 인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지역적 분류에서 리치가 가장 많은 인물을 만난 곳은 北京으로 이것은 리치가 북경진출을 계속 시도했던 것과 연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난 것은 南京인데 남경에서 만난 인물들은 북경에서까지 만남이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둘째, 출신지별 분류에서 리치와 만난 인물의 출신지 중 가장 많았던 省으로는 浙江, 福建 ,南直隷, 江西의 순서로 이곳은 당시 문화적으로 발전된 지역이었으며 학위소지자의 배출이 많은 지역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리치가 북경에 도착하기 이전 주된 활동지역이 강남지역이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일정한 수준 이상의 학문을 소유한 지식인들이 리치의 학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리치와 만났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셋째, 관직에 의한 분류에서는 1583년에서 1595년 사이에 만난 인물들은 知府, 知縣 등의 지방관이 대부분이었지만 1595년 이후에 만난 인물들은 侍郎,給事中 등 남경과 북경의 중앙관리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서학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인물 중에서 종교와 과학을 모두 수용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徐光啓, 李之藻, 瞿太素 李應試 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 서광계만이 종교를 수용한 후에 과학을 수용한 인물이며, 이응시, 구태소, 이응시는 과학에 대한 관심에서 종교에 대한 관심까지 이어졌다고 보여진다. 종교만을 수용한 인물로는 溤應京, 楊廷筠 등이 있다. 서학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이들의 서학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면 유교의 기반 위에 서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이었다. 서학에 대해 비판적인 반응을 보인 인물로는 虞淳熙, 黃輝 등이 있는데 이들의 입장은 리치가 유교와의 접근을 시도한 것에 대해 일반 보수적 유교인사들의 입장에서 리치가 유교의 권위를 침해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반응과 리치의 불교비판에 반발한 불교 관계 인사들의 반응이 연결되어 이후破邪論을 형성하게 되었다. 단순한 친분관계 유지자는 리치가 만났다고 기록한 인물의 약 3/4을 차지하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동림당계 인물인 葉向高,溤琦,鄒元標, 양명학파 인물인 祝世祿,焦竤,李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중에서는 리치의 활동을 도운 인물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만남이 리치가 동림당, 양명학과 관계를 가진 것은 아니며, 개인적인 입장에서 만나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명말 동양과 서양의 문화교류에서 리치의 적응주의적 방침으로 인해 많은 한인사대부들이 리치와 만남을 가지게 되었고, 그 만남이 서학을 수용하였다는 부분도 있겠지만 이미 중국 측에서 사상적, 문화적인 면에서 수용준비가 되어있었고, 또한 학문적인 관심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리치와 만난 인물 중에서 사대부계층이 많은 것은 리치가 전교의 방침으로 상충으로부터의 전교를 채택하여 일반인이 아닌 사대부계층을 대상으로 삼은 부분도 있지만 한인사대부는 리치에 대한 관심, 서양의 과학에 대한 관심에서 리치와 만났다고 보여진다. 본 논문에서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 교류에 있어서 서학의 중국전래에 대한 중국 측 반응이라는 측면에서 마테오 리치와 만난 한인사대부에 대해 살펴보았다. 당시 서학에 대해 관심을 보인 계층은 지식인계층이었으며 일정 수준 이상의 학식을 가진 인물들이었으며 관직도 6品이상의 인물들이 많았다. 이러한 특징은 리치의 중국 활동 중 1595년 이후 만난 인물들에서 잘 보이고 있다. 리치와 만난 한인사대부들의 분석은 중국에서 서학을 받아들인 계층에 고찰하는 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되며 자세한 연구를 위해서는 리치와 만난 인물뿐만 아니라 명말 청초 선교사들과 교류한 인물들에 대한 전반적인 분석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 한인사대부들의 서학에 대한 인식과 이해에 대한 좀더 상세한 고찰을 통해 서학 수용자들이 문화교류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This paper is a study of the contact between Matteo Ricci, who had visisted China in late Ming(明) specifically in the time of Wan-li(萬?), and Chinese literati(漢人士大夫) with the purpose of investigating the reaction of China in terms of spread of Hsi-hsüeh(西學) from the West to the East in the late Ming and early Ching(淸)era. By inquiring into the social and cultural background of the Chinese literati that had contacted, this text is focused on reaching an understanding of the Chinese perspective on Hsi-hsüeh spread. Through the analysis of the Chinese literati, this text intends to present what walk of the society at that time was interested in Hsi-hsüeh also covering how aggressive they were in acceptance of the same. Matteo Ricci first introduced western science such as astronomy, mathematics, and geology to interest Chinese literati intellectually with the intention of introducing Catholic eventually and therefore contacted a lot of people. Ricci had chosen the accommodation policy in order to have Jesuit Missionary understand the Chinese life style, culture, also have them learn Ssu-shu(四書) elaborating that Catholic and Confucian moral are in accord. From this very perspective he explained that Catholic can compliment Confucianism, on the other hand he ruled Buddgism and Taoism as cult asserting so-called Pu-ju i-fo(補儒易佛) apparently condemning both Buddhism and Taoism. The above- mentioned backgrounds enabled Ricci to have contact with Chinese loterati and his time of leading activities can be divided into three periods. The 1st period is from 1593 to 1595 when Ricci resided in Chao-ching(肇慶), Shao-chou(韶州) laying the groundwork of missionary. The 2nd period, from 1595 to 1601, Ricci spent most of his time in Nan-chang(南昌) and Nan-ching(南京) contacting a lot of Chinese literati of course with the advantage of reputation as scholar and stable missionary policy. The 3rd period, from year 1691 to 1610, is the one Ricci was granted the permission to reside in Pei-ching(北京), actually working on missionary work and bearing the fruit from it. The people Ricci contacted may be classified by the regions, their native places, and government services; by the extent of pros and cons; and those other people who were just acquainting with him. From the first regional classification, Pei-ching was the place where most Chinese literati that Ricci contacted originated from which refers to his consistent effort of launching into Pei-ching. This naturally refers to the fact that Nan-ching was the 2nd most Chinese literati, that he contacted, were from and their acquaintances usually were extended in Pei-ching. Secondly, the popular native provinces of Chinese literati of his contact were Chenching(浙江), Fuchien(福建). Nanchihili(南直隷), and Chianghsi(江西) in turn which were all culturally developed at that time which almost act accordance with production of large number of scholars. This very aspect reveals that intellectuals with somewhat knowledge over certain degree were interested in interchange shows us that compared to the people he met between 1583 and 1595, the people he met agter were mostly from nan-ching of Pei-ching and even people from other provinces were mostly high-ranking officers. Both Hsü Kuang-ch'i(徐光啓) and Li Chih-taso(李之藻) accepted religion and science among the people who were in favot of Hsi-hsüeh, meanwhile Feng Ying-ching(溤應京)and Yang Ting-yun (楊廷筠) accepted religion only followed by Yu Ch'un-Hsi(虞淳熙) and Huang Hui(黃輝) being negative about His-hsueh. People he contacted for just acquaintances were about 3/4s of the whole people and could be represented by Yeh-Hsiang-Kao(葉向高), Feng Ch'i (黃輝), and Tsou Yüan-piao(鄒元標) from Tung-lin party(東林黨), Chu Shih-lu(祝世祿), Chiao Hung(馬竤) and Li Chich(李?) who were the learners Yang-ming hsueh(陽明學). However the contact does not appear to be relevant to Tung-lin party or Yang-ming hsueh yet perso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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