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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放直後 「民主主義民族戰線」의 形成과 그 性格 硏究

Title
解放直後 「民主主義民族戰線」의 形成과 그 性格 硏究
Other Titles
(A) Study on the Formation and the Chracter of the Democratic National Front Right after the Liberation
Authors
柳姃林
Issue Date
1992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Keywords
해방직후민주주의민족전선민족통일전선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This study set the goal at researching the formation and character of Democratic National Front(DNF) on the trend of Unified Front Movement by revolution movement group which was leaded by the Communist Party of Korea(CPK). Even though the DNF was very wide range theme on the point of the various composition factors and the long term of existence. This research focused on the organizing procedure of DNF and the early activity because it was easy to catch the original character of DNF. The CPK, regarded themselves as the front party of the revolution movement groups, decided to be able to execute the peaceful revolution on account of Korean political situation at that time. So the CPK aimed at founding the people's government on the several political groups' unified front and tried to unify among the political groups actively. Those activities faced to oversea exile group, which was represented by Ryee Seung Man and Kim Gu, and inland right-wing group's opposition, But this situation came to change by the reason of Moskwa Three Ministers' decision on the late 1945, By the chance of Moskwa meeting, the revolution movement groups including the CPK took the strategy to solve Korea problem by the actualization of Moskwa Three Ministers' decision. The CPK pursued unification by the only favorable side and took the exclusive attitude to the opposite side. The whole favor to the Moskwa decision made the CPK be stiff to other groups and this became a major factor that it was impossible to unify the various groups. After Three Ministers' Meeting, the CPK's activity resulted in the DNF. This was consisted of the favorable groups to the Three Ministers' decision. Actually, DNF aimed at executing Moskwa Three Ministers' decision, The CPK, thought that founding the Korea government by the U.S.A.-Soviet joint committee was the best way to solve the Korean problem and it would be successful. So they intended to participate in the joint committee to execute their aim. The rupture of the first joint committee made the DNF be in confusion. The groups, which joined the DNF, agreed with the limite aim which was founding government by the joint committee. Therefore, there must be a mutual agreement but the DNF was not a proper organization. The DNF took an optimistic view of the Three Ministers' decision and they didn't prepare the possibility to fail. After this, the DNF could not adjust internal opinions and showed those to others. After the formation of the South Labor's Party (1946. 11), the DNF had just their name. This meant that the character of the DNF could not become the true sense of the National Unify Front, In other words, I thought the DNF was just the temporary federation that was consisteed of the groups which agreed with the limited aim to execute the Three Ministers' decision.;본 논문은 해방직후 '民主主義民族戰線'(이하 民戰)의 결성과 활동을 朝鮮共産黨(이하 朝共)을 중심으로 한 좌익세력의 통일전선운동이라는 흐름에서 그 특징과 문제점을 살펴보려 한 것이다. 변혁운동세력의 전위당을 자부하던 朝共은 해방직후 조선의 정세로 보아 평화적인 혁명 수행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정치세력들의 통일전선을 토대로 한 인민정권의 수립을 당면목표로 하고 정치세력간의 통일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갔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들은 이승만 김구 등의 해외망명세력과 국내우익세력등의 반대에 부딪쳐 곧 한계에 이르렀는데, 당시의 이같은 상황에 일대 변화를 초래한 것이 1945년 말에 발표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내용이었다. 이를 계기로 조공을 비롯한 좌익세력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실현을 통한 조선문제 해결을 당면 노선으로 삼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공은 3상회의 결정에 찬성하는 세력만의 통일을 추구하였으며 그 외의 세력에 대하여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3상회담 결정의 '총체적 지지'라는 입장은 타 정치세력에 대한 조공의 태도를 매우 경직화시켰으며 이것이 다양한 세력과의 통일을 불가능하게 한 근본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3상회담 발표 이후 조공 활동의 결실이 곧 민전이다. 이는 3상회담 결정에 의한 조선문제 해결에 찬성하는 세력들만의 조직적 연합체였다. 민전은 모스크바 3상회담의 실현을 그 본래 사명으로 하였다. 즉 조공은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를 통한 조선임시정부 수립이 당시 상황에서 조선문제 해결의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하였고 또한 실현가능한 것으로 보아 민전을 통해 공위에 적극 참가하여 그 목표를 실현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 1차 미소공위의 결렬은 민전의 노선에 커다란 혼란을 초래하였다. 민전에 포괄된 세력들은 미소공위를 통한 조선임시정부 수립이라는 한정된 목표에만 동의하고 연합한 것이었다. 따라서 결렬 이후의 상황에서는 포괄된 세력들 간에 새로운 합의가 도출되어야 했는데 민전은 이 논의를 이끌어가고 새로운 결론을 찾아내는 데 적절한 기구가 되지 못하였다. 이는 지도부가 3상회담 결정의 실현을 지나치게 낙관하여 그 실패 가능성에 대하여는 전혀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민전은 내부에서조차 이견을 조정하지 못하고 분열을 노정하였는데 좌우합작과 좌익3당합동을 거치면서 분열상이 증록되어간다. 결국 공위결렬 이후 민전은 좌익세력간의 의사조정기구 역할조차 하지 못하고 정국의 흐름에 따라 표류하였고 남로당 창당(1946. 11) 이후에는 그 존재가 유명무실해져갔다. 이는 민전의 성격이 진정한 의미의 민족통일전선이 되지 못한 것은 물론 나아가 좌익통일전선조차 되지 못하였던 것을 의미한다. 즉 민전은 3상 결정의 이행이란 한정된 목표의 수행에만 동의한 세력들이 한시적으로 연합한 기구에 불과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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