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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年代 「地主會」의 組織과 活動

Title
1910年代 「地主會」의 組織과 活動
Authors
崔芝瑛.
Issue Date
1993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Keywords
1910년대지주회일제하농업정책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The aim of this essay is to examine one aspect of Imperialist Japan's agricultural policy in 1910s through the organisation and operation of the Society of Landowners(地主會), the leading agricultural body under the Japanese rule. In this period, Imperialist Japan aimed the internal arrangement of colonial agricultural policy, namely the establishment of landownership system. However its coercive administrative power(e.g., police, M.P., etc.) had limits for its aim. So Imperialist Japan organised special agricultural body on the basis of the class through the 'Important Order on the improvement and increase of the rice- and cotton cultivation, sericulture, cow-rearing' in 1912. We can see the nature of Japanese indirect rule of the relation of production of Chosun farmers through this Society of Landowners. As the district-unit body of the rice field owners, the Society is characterised as nation-wide organisation. It represented in different areas under the names of 農事奬勵會, 勸農會, 地主組合, 地主會. First established in 1912, it had spread all over the country in 1915. Until absorbed by Chosun Agricultural Society(朝鮮農會) in 1920s, it had 124 local organisation and 93,000 members in 11 provinces except Kangwon(江原) and Hambuk(咸北). As the semi-bureaucratic body, the Society participated not only the regulation but also the organisation, management and project of the Society. For this activity, the Society followed the rules '地主會規約準則'. The requirement of membership is qualified to the landowners who had farmlands over 3-5 Jung-bo(町步). The management of the Society depended on the sponsor's contribution or landowner's self-financing. Thus the Society could not operate effectively because of the weakness of financial ground and inter-Society economic difference. So in 1918 the Society enforced its control over landowners through the reorganisation of its body as the form of the Provincial Society of Landowners(道地主會) or the Council of Landowners(地主協議會). With them, the requirement of membership was also enforced. The project of the Society coincided with the direction of the agricultural policy, that is improvement of variety, farm appliance and fertilisation, competitive show, etc. This intended not only the replacement to the Jananese varieties, but also yield-increase through exploitation of manpower. The Society made active participation of landowners at agriculture, and guaranteed the break of the tenant-contract, if the tenant would not keep the rules of the Society, This resulted in enforcement of the landowner's right and loss of tenant's position as independent farmer. After all, the Society of Landowners was the agency of Japanese Imperialist agricultural policy. It propagated Japan's superiority and militated in favor of landowner's right.;본 논문은 일제하 1910년대 農業政策의 일면을 주요한 農事團體인 地主會의 組織과 活動을 통해 살펴보려 한 것이다. 1910년대는 植民地 農業政策의 내적 정비기로서 「土地調査事業」과 「米作改良政策」으로 植民地 地主制가 確立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정책 시행에 있어서 헌병 경찰 등 소수의 武斷的 행정력은 한계를 갖는 것이었다. 따라서 1912년의 「米作 綿作 養蠶 畜牛의 改良 增殖에 관한 重大訓示」로써, 조선내부에 계급적 기반을 갖는 별도의 농사단체를 조직하여 농정을 대행할 방침을 정하였다. 이때 가장 힘을 기울인 것이 地主會의 조직으로, 이를 통해 1910년대 농정이 조선농민의 생산관계를 간접적으로 지배해 나가는 구체적 모습과 그 성격을 알 수 있다. 地主會는 米作農耕地의 所有者로써 郡單位로 조직된 日帝의 農業施策의 下部施行團體로서, 여타 산업단체와는 달리 지주전체를 망라하는 전국적 단체라는데 큰 특징이 있다. 지역에 따라 名稱이 農事奬勵會(경기도), 勸農會(전북), 地主組合(충북, 경북, 평북), 地主會(충남, 전남, 경남, 평남, 함북, 함남) 등으로 나타나는데 실제의 활동과 조직구성은 동일한 것이었다. 1912년 설립되기 시작하여 1915년에는 전국적으로 설립을 거의 완료하여 외형적인 틀을 갖추었으며, 1920년대 朝鮮農會에 흡수 통합되기까지 강원도와 함북을 제외한 11개도에 걸쳐 124회에 93천인의 회원을 갖고 있었다. 地主會는 半官制的 단체로서 道에서 발한 '地主會規約準則'에 따라 각 郡은 會則의 제정에서부터 회의 조직과 운영 및 사업내용에 이르기 까지 전면적으로 관여하면서 郡勸業方針을 관철시켰다. 會員의 資格은 3-5町步 이상의 중소규모의 지주를 대상으로 하였다. 會의 운영은 회원 중 독지가의 寄附金 또는 사업을 맡은 지주의 自發的인 出資에 의존하는 등 재정기반의 취약함과 會 내부의 계층적 편차로 인해, 외형적 조직에 비해 실제 활동은 원활하지 못하였다. 이에 회원자격을 대지주로 강화하고 道地主會나 地主協議會 등의 형태로 조직을 재편 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지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會의 사업은 농정의 방향과 일치하는 것으로 品種改良, 施肥改善, 農器具改良, 講習會·品評會를 내용으로 하였다. 이는 일본품종으로의 교체를 강제하는 한편 노동력 수탈의 증대를 동해 수확을 높이려는 의도였다. 會는 지주가 농사경영에 적극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농사개량에 따르지 않는 소작인은 소작계약을 파기할 수 있게 보장함에 따라 소작권의 이동 및 소작료의 인상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지주권은 강화되었고 소작인은 독립경영자적 위치를 상실하는 결과가 되었다. 결국 지주회는 일제의 농업정책을 수행한 대행기관이었고, 일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교화의 장이었으며, 지주권을 강화하는 한 계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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