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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後期 白磁硯滴 硏究

Title
朝鮮後期 白磁硯滴 硏究
Other Titles
(A) Study on White Porcelain Waterdropper of Late Joseon Dynasty
Authors
황이숙
Issue Date
2003
Department/Major
대학원 미술사학과
Keywords
조선후기백자연적Porcelain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硯滴은 대표적 文房器物의 하나로 水口와 氣孔이 있어 소량의 물방울을 벼루에 떨어뜨리도록 제작한 기명을 의미하며, 벼루와 고체 먹의 사용과 함께 발달하였다. 硯滴은 時代를 거치며 다양한 재질로 제작, 변천하는데, 특히 朝鮮後期에 이르면 전에 비할 수 없는 다양한 白磁 硯滴이 量産되고 傳世되고 있어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朝鮮後期 窯址의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絶對編年資料가 부족한 이유로 이 시기의 陶瓷製 文房具類에 대한 연구는 미비한 실정이다. 본 연구는 최근까지 활발히 전개되어 온 硯滴을 위시한 朝鮮後期 文房諸具의 전시와 文房諸具 관련 시문의 집성 등의 성과에 주목하여 국, 내외에 소장된 풍부한 현전 유물과 硯滴 관련 문헌자료를 수집하여 그 계보와 변천을 추적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더불어 조선조를 일관한 유교의 풍은 文房具 제작의 좋은 자극제가 되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朝鮮 後期에 유독 많은 유물을 남기게 된 구체적인 원인과 제작배경에 대한 조망을 의도해 보았다. 硯滴을 비롯한 文房器物이 다량으로 제작되었던 朝鮮 後期는 兩班 내부의 분열을 통해 閥閱과 관직을 얻지 못한 沒落 兩班의 이원화가 이루어지는데 벌열, 특별히 경화세족으로 말해지는 특수 집권층은 양반 문화를 주도해 나갔다. 문방류 골동품을 수집, 완호하는 이들의 문화는 조선후기 문방제구의 발달의 원인이 되었고, 이들의 문화를 종유하는 중서층의 성장과 양반의 수적인 증가는 연적을 포함한 문방제구의 양산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는 도자사적으로는 私燔이 확산되었던 시기였다. 顯宗代부터 사료에는 誌石 私燔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데, 17세기 말경에는 誌石 私燔과 더불어 文房器物을 私燔하였다는 기록이 남겨지고 있어 이 시기 문인 사대부층의 취향이 私燔을 통해 도자 기물, 특히 문방용 기물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본 논문에서는 절대적인 편년자료가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으나 도자 양식적인 보편성 안에서 相對編年資料를 분석하여 50년 간격으로 나누어 朝鮮 後期 硯滴의 변천을 추적해 보았다. 먼저 1期로 설정한 18世紀 前半은 문인의 취향이 硯滴에 적극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하며 硯滴이 독립된 기물로 제작되는 본격적인 시기로 상정해 보았다. 이 시기는 分院이 分院里로 고정되기 이전, 官坪里, 五香里, 觀音里, 金沙里 窯址등의 시기로 제도적인 기틀을 이루었던 시기이며 동시에 私燔이 확산되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朝鮮 中期 硯滴과 연결되는 八角 硯滴, 타원형 硯滴 등의 기본적인 형태의 硯滴들이 제작되었으며, 섬서형의 硯滴의 제작이 시도되었던 시기였다. 문양에도 문인 취향이 반영되어 소소한 草花紋이나 詩紋 등이 사용되었다. 2期는 19世紀 後半으로 점차 靑畵 안료의 구득이 손쉬워지고 靑畵 안료의 사용이 자유로워지면서 시문의 소재가 확대가 확대되었던 시기로 추정해 볼 수 있다. 1752년 分院里로의 고정 이후 靑畵白磁 확산과 규제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나 정교한 甲燔 瓷器가 민간에 유통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시기 編年 資料를 통해 八角 硯滴의 제작이 활발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18세기 前半 제작되기 시작하였던 象形 硯滴의 전통이 수구의 장식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方形硯滴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의 시문 기법으로는 양각 기법이 등장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主가 되는 시문 기법은 靑畵 안료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앞서 부분적인 靑彩. 鐵彩 등이 행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시문 소재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문인의 취향을 나타내어 주는 시문소재가 18세기 전반에 이어 지속적으로 나타나며 여기에 性理學的 성격을 드러내어 주는 八卦, 太極紋이 더하여져 크게 유행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3期는 19世紀 前半으로 시문 기법의 다양화와 기형의 발전이 그 특징으로 생각된다. 19世紀 前半은 정조 후반경 내려졌던 靑畵白磁 금지령이 사실상 풀리고 私燔도 재개되어 私造 瓷器의 민간 유통이 더욱 확대되는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의 編年資料를 통해 筆洗와 筆架 혹은 筆洗와 硯滴 등을 병용할 수 있는 다양한 문방 기물이 발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方形의 硯滴이 19세기 중엽 경에는 유행하기 시작하여 다량 제작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이 시기 연적에서 주목되는 것은 수구의 형태에 있어 양감이 사라지고 대롱처럼 짧고 직립하는 수구가 부착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시문기법에 있어서는 본격적으로 陽刻 技法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陰, 陽刻, 透刻, 구분적인 靑彩, 銅彩, 鐵彩 등의 다양한 시문 기법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시문 양상은 다소 단순화, 도안화되어 간다. 八卦紋, 文字紋, 싯구 등이 지속적으로 시문되면서 약화된 소상팔경의 한 소재와 같은 山水紋과 菊花紋, 梅花紋 등 단순화된 사군자의 한 소재가 시문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4期는 19世紀 後半에서 20世紀 初半 한일 합방 이전의 시기로, 일본의 제작 기법 유입과 분원의 민영화 등의 영향으로 다량 생산이 이루어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丙子修護條約 이후 수입자기들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유입되는데, 특히 倭沙器 수입의 증가는 당시 민간을 대상으로 상권을 확보하고 있었던 분원자기의 생산과 판매에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의 연적은 형태가 다양해지고 시문 면적이 확대되는 반면, 제작 수법이나 시문 수법은 정교하지 못한 편이다. 編年資料를 통해 扇形, 環形, 山形 등의 다양한 형태가 제작되었으며 壽福紋 등의 길상성을 띈 문양소재가 활용되고, 銅彩 靑彩, 鐵彩 등의 기법 등이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틀을 이용한 성형의 기법을 통해 이 시기 자기 제조가 대량으로 이루 어질 수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틀을 이용한 연적의 존재는 19세기 말경까지 硯滴에 대한 민간의 수요가 많았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다수의 현존 유물이 전세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편년자료와 요지 출토 자료의 부족이라는 한계성 때문에 아직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던 朝鮮 後期 硯滴에 대한 첫 접근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근본적인 한계성에 대해서는 현존 유물을 최대한 수집, 분류하고 相對編年資料와 文獻資料를 보완하여 극복해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굴된 朝鮮後期 기년명 자료들과 분원의 운영에 관한 문헌자료들은 朝鮮後期 白磁 연구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로 생각되며, 朝鮮 後期 도자사의 보편적 발달 안에서 硯滴이라는 기명의 변천과정을 유추해보았다는 데 본 연구의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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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대학원 > 미술사학과 > Theses_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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