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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百濟의 加耶進出과 그 성격

Title
6세기 百濟의 加耶進出과 그 성격
Other Titles
(A) Study on the Advance of Paekjae(百濟) to Kaya(加耶) and the Characteristic in the 6th century
Authors
金愛敬
Issue Date
1998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Keywords
백제가야가야진출6세기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百濟는 5세기 전반 高句麗의 남하로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東城王(479-501). 武寧王(501-523), 聖王(523-554)을 거치며 국가체제를 재정비하고 전제왕권을 확립하였다. 본고에서는 이 시기 국가적 발전을 바탕으로 한 百濟의 加耶진출을 살펴보았다. 기존 百濟史 硏究에서는 百濟의 중흥에 대해 한강유역으로의 진출과 실패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그러나 百濟의 한강유역 진출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이에 앞서 진행된 남부에서의 가야지역 경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百濟는 남부지역 경영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 과정을 통해 百濟가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자구노력을 전개했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한 종합적인 검토를 통해 百濟가 한반도의 주도권 싸움에서 소외되는 과정과 삼국통일을 앞둔 6세기 한반도에서의 세력구도를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百濟는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16관등제와 22부제의 중앙조직 정비와 方-郡-城체제의 지방제도 확립을 통해 국내 안정을 도모하고 高句麗남하 이후 단절되었던 중국과의 통교를 재개하여 국제적 지위를 회복하였다. 한편 高句麗는 북방의 突厥에 대한 견제와 내부의 정치권력다툼으로 남쪽지역 방어에 관심을 집중할 수 없었다 이를 이용하여 百濟는 광개토왕이후 高句麗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新羅와 연합하여 高句麗와의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百濟는 이와 같은 국내외적 안정을 바탕으로 농업 생산지와 鐵,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섬진강 유역과 남부가야지역으로의 진출을 단계적으로 추진하였다. 新羅가 지증왕 이후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百濟와 경쟁관계에 돌입하면서 가야지역이 百濟와 신라간의 세력균형을 위한 완충지대로서의 중요성을 더하게 되었고, 따라서 百濟는 고구려에 대비하고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가야지역 확보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던 것이다. 百濟의 가야진출은 섬진강 유역에 대한 확보로 시작되었다. 5세기 후반 가야세력과의 帶山城 戰鬪에서 승리한 百濟는 爾林지역(전북 임실)을 장악하고 513년 己汶(남원)을 영유한 후 단계적으로 섬진강 지역 진출을 시도하여 529년에 帶沙(하동)까지 통합하였다. 百濟는 섬진강 유역의 장악을 통해 교역, 특히 倭와의 교역을 촉진시킬 수 있었으며 가야세력을 위축시키고 낙동강 유역 가야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다. 섬진강 유역을 장악한 후 百濟는 2차례에 걸쳐 任那復興會議(541년. 544년)라는 외교적 방법을 통해 남부가야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百濟는 고구려에 대한 방어와 한강유역 舊地 회복을 위해 南加羅, 喙己呑 등 인접한 가야세력을 통합해 나가는 新羅를 군사적으로 자극하지 않고 형식적이나마 협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러한 가운데서 남부가야측이 新羅에 완전히 편입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외교적 방법에 의한 회유책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百濟는 점령한 가야지역에 지방관인 軍令, 城主를 설치하여 중앙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와 같은 외교적 성과에 힘입어 百濟는 고구려에서 陽原王 즉위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내분을 이용하여 新羅, 가야와 연합군을 결성하고 한강유역을 탈환하였다(551년). 그러나 新羅는 百濟가 차지한 한강 상류역을 공격하여 新州를 설치하였고(553년), 百濟는 가야, 왜 연합군과 新羅의 管山城을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百濟측은 新羅에 패배하여 한강 유역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였으며 이후 낙동강지역의 가야제국과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북부가야지역이 모두 555년-562년을 전후하여 新羅에 편입되었다. 가야지역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로서 百濟와 新羅는 이 지역을 둘러싸고 외교, 군사적으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나 가야지역 대부분을 新羅가 병합함으로써 百濟는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잡는데 실패하였다. 결정적인 계기는 管山城 戰鬪였지만, 百濟가 끊임없이 고구려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新羅와 달리 百濟는 점령한 가야지역에 대해 군사적 측면을 제외한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자립을 유지하도록 함으로써 가야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통제가 불가능했던 점도 생각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가야지역이 新羅에 병합되었지만 百濟는 섬진강 유역 진출을 통해 왜와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성공적인 외교정책으로 가야지역을 新羅와의 완충지대로 적절히 활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변혁기인 6세기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결과론적인 "실패"에 집착하기보다는 이러한 상황에 적응하려는 百濟의 노력이 가야지역의 진출로 표출된 것으로 이해하려는 시각이 필요할 것이다.;Paekjae(百濟) was in a crisis because of the advance to the South of Goguryeo(高句麗) in early 5th century but through the king of Dongsung(東城王), the king of Munyung(武寧王), the king of Sung (聖王) Paekjae readjust a state and establish absolute authority. This thesis is written about that it marched to Kaya(伽倻) on the basis of the development of this country. About the restoration of Paekjae the former study is concerned in the advance and failure to Han River. But to examine the march of it to the basin of Han River, we have to study the management of Kaya in South. In fact Paekjae payed attention to the management of South and it shows us that it tried to accomodate the change of the times. And through the synthetic study, we can understand how it was failed to take the leadership of the power before the unification of three nations in 6th century. In late 5th~early 6th century, Paekjae prepared the central organization of the system and established the local system of Bang(方)-Goon(郡)-Sung(城). So it was stabilized and interchanged with China again and recovered the international prestige. In a way Goguryeo could not defend South area because of the retrain of Dolgwul(突厥) in North and political power Competition. Paekjae combined with Silla(新羅) which intended to get out of the interference from Goguryeo and could gain a victory with Goguryeo. On the basis of the stabilization of the inside and outside of the country, Paekjae tried to secure the agricultural producing center and the trading way to Japan, China. So promoted the advanced to South Kaya area and the basin of the Sumjin River. After the king Jizeung, Silla prepared the state system and competed with Paekjae, Kaya have an important position as the buffer zone between Paekjae and Silla. So Paekjae tried to restrain Goguryeo, take the leadership in Korea Peninsula and secure Kaya. The advance of Paekjae to Kaya was started as the security of the basin of Sumjin River. After late 5th century, it won a victory in the battle of Daesansung(帶山城) with Kaya and dominated Erym area(爾林). In 513 after Paekjae possessed Gymun(己汶), it attempted the advance to the basin of the Sumjin River by stages and in 529 unified Daesa(帶沙). As it dominated Sumjin River, Paekjae could promote the trade with Japan. As it dominated the main trade harbor in Daekaya(大伽倻), Kaya was depressed and Paekjae could advance to the basin of the Nakdong River. After the domination of the basin of the Sumjin River, Paekjae intended to acquire influence in South Kaya through Conference of reconstruction in Eamna(任那)- the diplomatic way-. To defend Goguryeo and restore the old land in the basin of the Han River, Paekjae did not press militarily Silla which unified Kaya and tried to keep the cooperation relationship with Silla formally. Paekjae took a conciliatory measure as a diplomatic method because it was worried that Kaya was joined to Silla. It established Gunroung(君令), Sungjuin(城主) in Kaya and strengthen the center control. Owing to the diplomatic result like this, Paekjae organized the allied forces of Sinla, Kaya using the internal trouble of Goguryeo due to the coronation of the king Yangwon and possessed Han River(551). But Silla occupied the upper stream of Han River which Paekjae has possessed and established Sinju(新州)(553). Paekjae attached the castle of Kwansan with the allied forces of Japan, Kaya. Paekjae was defeated this battle and was deprived of the control over the basin of Han River. After that, Kaya in the basin of the Nakdong River and North Kaya Area was incorporated in Silla. Kaya Area was an important place economically and militarily. Paekjae and Silla did the offensive and defensive battle around this place diplomatically and militarily. But as Silla incorporated most Kaya Area, Paekjae failed to take the leadership. The conclusive chance was the castle of Kwansan battle, but it was very important that Paekjae had a burden to Goguryeo. On the contrary to Silla, Paekjae let Kaya become independent politically not militarily. So it could not control Kaya continually. As a result, Kaya was incorporated in Silla but Paekjae could keep the diplomatic relationship with Japan closely because of the advance to the basin of the Sumjin River and used Kaya as the buffer zone with Silla owing to the successful diplomatic policy. And Paekjae could possessed Han River. To understand the changable 6th more correctly, it is not so good to concentrate on the consequent failure of Paekjae. We need to understand that the effort of it to accomodate this condition is expressed in the advance to K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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