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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이후 일제의 軍用地 收用과 한국민의 저항

Title
러일전쟁이후 일제의 軍用地 收用과 한국민의 저항
Other Titles
Japan's Land Expropriation after the Russo-Japanese War and Koreans' Resistance : Centered on the cases of Seoul(Youngsan), Pyongyang and Euiju
Authors
宋芝淵
Issue Date
1997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Keywords
러일전쟁이후일제군용지 수용한국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이 논문은 러일전쟁이후 진행된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작업 중 한국 내에 영구적인 군사기지를 건설하고자 실시하였던 軍用地 수용정책을 서울(용산), 평양, 의주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개항이후 끊임없이 한국에 대해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침략의 발판을 마련해 왔던 일본은 러일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인 한국의 식민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러일전쟁 중 일본은 <韓日議定書>, <제 1·2차 韓日協約> 등의 불법적 침략 조약을 강요하며 한국을 소위 보호국화하였으며 군사적인 탄압기구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한국 식민지화의 중요한 관건인 군사적 지배를 실현하고자 영구적인 군사기지를 설치할 목적으로 광대한 軍用地를 수용하였다. 일본에 軍用의 명목으로 한국내의 토지를 수용할 수 있었던 근거는 1904년 러일전쟁의 개시와 함께 일본의 강요로 체결된 <韓日議定書>의 제 4조에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收用할 수 있다'는 조항에 따른 것이었다. 러일전쟁이후 일본군에 의해 군용으로 수용된 토지는 다음과 같은 4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러일전쟁의 개시와 함께 일본 육·해군에 의해 포대 설치, 전신소 설치 등으로 점유된 주요 沿岸 및 島嶼지역과 둘째 경의선, 마산선 등 군용철도용지, 셋째 韓國駐箚軍의 주도로 행해진 한국 주요도시 서울(용산), 평양, 의주 지역의 병영부지, 넷째 統監 伊藤博文과 일본 해군의 협력하에 이루어진 진해만, 영흥만의 군항화를 위한 軍用地 등이다. 본고에서는 일본의 軍用地 收用政策 중 韓國駐箚軍의 주도하에 행해졌던 서울(용산), 평양, 의주 지역에서의 軍用地 수용과정에 대해서 고찰하였다. 서울(용산), 평양, 의주 지역의 軍用地 수용은 대상 지역이 대도시였다는 것과 일반 병영부지로서 약 1,000여만 평의 광범한 면적이 한꺼번에 수용되었기 때문에 당시 격렬한 한국인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은 軍用地 수용에 대한 한국정부의 반발을 군사적인 위협과 친일 관리를 회유하는 방식으로 무마시키고 軍用地 수용정책을 실시하였으며, 현지민의 抵抗을 군사력을 동원하여 탄압하였다. 또한 일본은 군략상 필요한 토지를 수용할 수 있다는 韓日議定書의 조항을 惡用하여 軍用地 1,000여만 평에 대한 보상금을 時價에 훨씬 못 미치는 헐값으로 책정하였다. 일본은 軍用地 수용 과정에서 주요 도시 근교의 그것도 철도 정거장 주변의 高價의 땅을 地價가 오르기 전에 미리 軍用地로 설정하고, 보상금을 時價에 못 미치는 헐값으로 책정한 뒤 일단 강제 철거를 단행하였다. 그리고 보상금을 수용 후 2-3년이 지난 후에 교부함으로써 한국민들에게 경제적인 교통을 안겨주었다. 반면 일본측으로서는 최저 비용으로 최대 이익의 효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일본은 경의선 沿線의 중요 도시인 서울(용산)·평양·의주에서 軍用地를 수용함으로써 한국 내의 영구적인 군사적 거점 확보뿐만 아니라 장래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또한 3지역에서의 軍用地 수용은 1904, 5년 당시 개항지와 주변 10里 以內를 제외하고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가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루진 것이었다. 일본이 약 1,000만평이라는 광범한 토지를 군용의 명목으로 수용한 것은 군용을 빙자한 일본의 對韓 토지 침탈의 한 형태였다. 일본은 수용한 토지의 대부분을 일본 거류민들, 상인, 일본인의 공장 부지로 불하함으로써 장래 식민지화에 대비해 대도시 중심부에 일본인의 거점을 확보하여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軍用地의 수용을 통한 토지 수탈은 한국민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것이었으므로 한국민의 저항은 격렬하였다. 그러나 정부측에서는 친일적인 관료들이 일제의 정책에 앞장서는 가운데 소극적인 항의에 머물렀을 뿐이었다. 지식층과 언론계에서는 軍用地 수탈의 침략성과 민중의 고통을 인식하였으나 항일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지 못했다. 일제의 침략정책에 대해 직접적인 수탈의 대상이었던 軍用地 수용대상 지역의 현지민들은 생존권의 보호를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다. 특히 방대한 토지를 몰수당한 서울과 평양의 현지민들은 地價報償, 토지 환원 등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일본군의 군사력을 동원한 탄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05-1907년간 현지민들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한편 의병계열의 경우 軍用地 수용에 반대하는 유생들이 일본정부에 격문을 보냈고, 친일적인 관료들에 대한 테러활동을 벌였다. 또한 의병 계열은 軍用地 수용의 부당성을 비난하는 격문을 내걸고 지속적인 항일의전을 전개하였다. 한국민의 저항에 대해 일제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강압적으로 탄압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불법적이고 기만적인 軍用地 수용정책이 국제여론의 비난을 받게 되자 일본 내부에서도 軍用地 수용정책의 개선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이 종결되고 <2차 韓日協約 (乙巳條約)>이 체결된 이후 統監으로 부임한 伊藤博文은 軍用地 수용으로 인해 야기된 국내외의 저항과 비난여론을 무마시키고자 용산 등의 軍用地 1,000여만 평 중 476만평을 환부한다고 밝혔다. 이것은 일본이 당시 격렬한 항일운동을 회유하고 국제여론의 비난을 무마시키기 위한 정책의 전환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軍用地의 반환은 군용의 명목으로 토지를 침탈하고자 획책했던 일제의 침략정책에 항거하여 한국민이 벌인 저항운동의 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This Paper will examine Japan's land(軍用地) expropriation policy Carried out in order to establish a military base in Korea as a part of the colonization the Russo-Japanese war. It will center on the cases of Seoul(Yongsan), Pyongyang and Euiju. Japan which had prepared a springboard for the political, military and economic invasion of Korea since the opening of ports pushed forward the n policy in earnest, taking advantage of the Russo-Japanese war. During the war, Japan made Korea its protectorate, concluding the Korean-Japanese Agreement(韓日議定書) and the 1st and 2nd Understandings (第1·2次 韓日協約). It instituted a military oppression system and also expropriated vast land to establish a permanent military base in Korea, hoping to the military domination which was the key to the colonization. The basis of the land expropriation for military purpose within the territory of Korea was the fourth article of the Korean-Japanese Agreement(韓日議定書) signed under the coercion of Japan with the beginning of the Russo-Japanese war in 1904: the necessary land can be expropriated for the military strategy. There were four types of land expropriated by the Japanese military forces the war. First, major coasts and islands were occupied by the Japanese m y and navy for the construction of forts and telegraph offices. Second, there was land expropriated for the building of the military railroad such as the line connecting Seoul and Euiju. Third, the Japanese military forces stationed in Korea expropriated land for the installation of barracks in major cities like Seoul(Yongsan), Pyongyang and Euiju. Finally, there was land expropriated in Chinhae and Younghung Bays for the building of military . It was advanced by Resident-General Ito Hirobumi(伊藤博文) and the Japanese navy. Here I will deal with the third type of the expropriation done in Seoul(Youngsan), Pyongyang and Euiju by the Japanese mititary forces stationed in Korea. The Koreans, at that time, made severe resistance to the expropriation enforced in Seoul(Youngsan), Pyongyang and Euiju because the areas were in major cities and the vast land of about forty million square yards was at the same time for building general barracks. Japan implemented the expropriation policy, smoothing the opposition of the Korean government with the military threat and the conciliation of the government officers who favored Japan. It suppressed the people resisting by the military force. And Japan also misused the article of the Agreement, earmarking only 200,000 won for the compensation of the expropriation of the land on square yards. The Japanese decided the land to be expropriated before the prices of the land were up, determined the compensatory payments lower the real market prices and cleared away the land by force. They also caused economic pain to Koreans by paying the compensatory money 2-3 years after the expropriation. The Japanese made the biggest income at the lowest expense. The Japanese forces expected the military land in the third district would serve as a permanent military stronghold and a supply base for the future invasion of the continent. The land expropriation in the third district was enforced when the land possession of foreigners beyond the open port areas was not yet guaranteed by law. It was a form of land pillage done by Japan under the pretence of the military use. Japan secured its strongholds in the major Korean cities for the future colonization, selling most of the land to Japanese people living in Korea for farming and building factories. The land exploitation by Japan in the name of military use brought about violent protests from Koreans because it deprived them of the right to live. However, the Korean government opposed it passively with its pro-Japanese officers pushing forward the expropriation policy. Although they recognized that the land expropriation was part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 and that the people were suffering from it, the Enlightened intellectuals couldn't initiate an active anti-Japanese movement. The people in the expropriation areas, directly suffering from the exploitation of Japan, protested more aggressively. Especially, those expropriated from their vast land in Seoul and Pyongyang staged vehement demonstrations, demanding for compensating the lost land or for returning it. Although Japan oppressed them by military force, the struggles of the people continued for three years from 1905 to 1907. Some Confucian scholars opposing the expropriation made manifestos toward the Japanese government. The loyal army gathered for saving the nation initiated wars against Japan, terrorizing the pro-Japanese government officers and issuing proclamations blaming Japan for the unjustice of the land expropriation for military use. Japan cracked down the resisting people by military force. However, as the land expropriation policy became under international fire, the movement arose even in Japan asking for the reformation of it. In 1905 the Russo-Japanese war was over and after the second Understanding(Eulsa Agreement) was signed between Korea and Japan, Resident-General Ito Hirobumi(伊藤博文) announced that Japan would return half the land it expropriated in Yongsan, Pyongyang and Euiju, in an attempt to solve the problem It was the reorientation of the policy to ease the international criticism and to soften the intense anti-Japanese movement in Korea. And it was the outcome of the resistance by the Koreans against the invasive poky of Japan which planned to the plunder land in the name of military 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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