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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世紀 大加耶의 政治的 位相

Title
5-6世紀 大加耶의 政治的 位相
Other Titles
(A) Study on the Phase of Deakaya(大加耶) at the 5th~6th century 1
Authors
曺瑛焄
Issue Date
1995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Keywords
대가야정치적 위상Deakaya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본 논문은 加耶史의 정치적 발전단계를 聯盟體로 설정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5-6세기 大加耶를 대상으로 하여 연맹단계를 해소하면서 고대국가체제를 구성한, 중앙집권국가로 향하는 대가야의 모습을 밝히고자 하였다. 기존의 연구 경향은 加耶諸國 사이의 정치적인 관계에만 관심을 기울여 왔다고 보겠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대가야의 정치세력은 어떤 형태로 구성되고, 어떠한 지배 이념을 갖고 운영하였으며, 세력의 확장은 어떻게, 그리고 그 영역은 어디까지 미쳤는가에 대해 살펴 보려 하였다. 그 방법으로는 기존 연구 성과에 힘입어 문헌의 분석과 고분 출토의 유물 분석 등 고고학적 성과를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본 논문은 종래 가야사를 단순히 연맹사로서 파악하고 가야지역을 하나의 정치체로서, 또한 정체적인 사회로 보아온 시각을 바꾸어 보려는 데 주안점을 두고, 가야사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大加耶는 3세기에 이르러 『三國志』에서 나타나듯 '半路國'이라는 작은 小國聯盟體에서 출발하여 4세기 중엽 國號를 '加羅'로 개칭하는 정치적 성장을 이루었다. 그 성장의 기반에는 높은 농업생산력과 철산의 개발이라는 경제적 기반과 백제, 고구려로부터의 선진 문물 수입이 뒷받침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세력 확장을 활발히 하여 高靈에서 河東에 이르는 교통로의 장악을 이루었으니 그 교통로는 섬진강구의 동쪽 高靈-居昌-咸陽-南原-蟾津江-河東이었다. 반로에서 대가야로의 정치체제 성격의 전환을 가져온 대가야는 5세기 중반 이후 王號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왕권의 성장은 동 시기 高靈 池山洞에 거대한 고총고분이 조영되고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6세기에 들어서는 지배체제하에 편제된 세력들이 旱岐를 칭하게 되는데 旱岐層은 그 세력 기반의 大小에 의해서 上·下旱岐로 분화되었고, 중앙 지배 조직으로서 旱岐會議體와 국왕직속의 官制인 首位制를 설치하였다. 교통로를 장악한 대가야는 그 영역 내의 소국들을 연맹체 내로 흡수하였다. 그 소국과의 관계는 연맹체 단계에는 대가야가 맹주국으로서 어느 정도 上下의 관계에 있으면서, 그 소국과의 관계는 고령으로부터의 지리적 원근에 따라 또는 각 세력의 강약에 따라 결정되었을 것이다. 이 때 高靈에서 河東에 이르는 陝川, 居昌, 咸陽, 南原 지역이 대가야의 지배체제에 흡수되었다. 지방 통제를 위하여는 중앙에 上·下加羅都를 두고, 영역 내 소국을 城을 단위로 편제, 지방정치세력을 약화시켜 나갔다. 지방통제의 형태는 수장을 통한 간접지배였으나 악사 于勒에게 가야금 12곡을 제작하게 하여 영역내 소국들의 일체화를 모색하였고, 6세기 초 대외 방비를 위하여 子呑·帶沙·麻須比·爾列比 즉 居昌·河東·三嘉·宜寧 등의 지역에 축성하였다. 이 때 烽候를 올리고 邸閣을 설치했으니 이는 상비군적 군대주둔이었으며 한편 築提, 築城, 古墳築造에서 그리고 각 시기별 군사동원에서 지방민을 역역에 동원하였을 것이다. 한편 대가야는 건국신화에 보이는 山神 正見을 시조로 숭배하였으며, 불교의 수용이후 지배층은 佛寺를 창건하고, 고분 벽화에 연화문을 장식하는 등 불교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한편 중국 예악사상의 영향을 받아 음악을 국가의 통치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하였으니 그 예가 우륵 12곡의 제작이다. 대외관계의 측면에서 살펴 본 대가야의 성장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5세기 후반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남진 대응에 분주한 틈을 타서 대가야의 영역확대와 대외관계는 한 단계 발전하였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479년 加羅王 荷知의 南齋에의 조공이었고 이는 내륙에 위치한 고령 지역의 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이미 대가야의 성장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섬진강을 통해 하동으로 이르는 길이 조공로로 이용되었으며, 백제의 방해를 극복하고 독자적인 외교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대가야는 대외관계에서 삼국간의 역학관계를 이용, 자국의 안보와 실리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예컨대 구원군 파병과 신라 法興王 9년 (522) 신라와의 결혼 동맹은 곧 대가야의 자주적 외교를 통한 국력 신장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가 가야지역 진출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상황에서 대가야는 親百濟의 외교노선을 선택하게 된다. 즉 551년에는 백제·신라와 더불어 한강유역회복전에 참전하였고, 554년 백제·왜와 함께 管山城 전투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친백제 외교는 오히려 백제의 가야 진출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가야는 신라나 백제와 같이 율령이 반포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6세기 중반 諸小國을 통합하면서 중앙에는 한기와 수위로 이루어진 지배 조직을 갖추었으며, 지방에는 城을 거점으로 간접지배를 실현하고 있었다. 또한 불교와 유학이 지배이념으로 기능하는 고대국가의 정치체제 단계에 진입하였던 것이다.;The aim of this study is to prove into the political development phase of Daekaya(大加耶) which has been known as the leader of the united of kaya(加耶). Daekaya was the small state what is called Banro(半路), which had been rich in iron and agricultural produce. In the last of the 4th century, economic power and superior culture of Paekjae(百濟) and Goguryeo(高句麗) promoted the growth, Daekaya expanded the sphere of influence. In the middle of the 5th century, Daekaya took over the trade road from goryong(高靈) to hadong(河東). On the other hand, neighboring small states had been absorbed into the united Daekaya. In 479, the king Haji(荷知) of Daekaya accomplished diplomatic relations with China, and that was Namjae(南齊) of southern Dynasty. Now we can see the process of the Daekaya's control power. At ancient times, diplomatic relations with China symbolized the political power of a nation. Daekaya's territory was area of the northwest of kyongsangdo(慶尙道), to put it concretely hapcheon(陜川), geuchang(居昌), hamyang(咸陽), namwon(南原) and hadong(河東). In the early of the 6th century, the rulling system of Daekaya was dual system, called Sang-ha Karado(上·下 加羅都), what was composed of the central force Goryong(高靈) and the second Dara(多羅) of Daekaya. The central government consist in Hanki class(旱岐層) and Soowee class(首位層) which were specialized into sang-ha system(上·下 體制). At first, the one was aboriginal governors, who was transformed Hanki class and Hanki class composed of the Hanki conference(旱岐 會議體). While the other Soowee formed bureaucratic system. The local ruling system utilized an indirect ruling style by aboriginal governor, the unit of small states was reorganized into seung(城) which was composed of chon(村). But Daekaya could not perfectly absorbed into control system, so it was quasi-independent. Goryong(高靈) which constructed a group of huge ancient tombs(高塚高墳) was the center of Daekaya, and the things that were unearthed there were very high level ones. What is called goryong style earthen vessle(高靈 樣式 土器) and Daekaya' s style grave system(大加耶式 墓制) were spreaded abroad the area of Daekaya. As Daekaya grew, a cultural area was almost the same with his terrytory, but the tomb's scale of the center was superior to district governor's. It shows us that Daekaya' s political power was stronger than it. King gasil(嘉實) of Daekaya commanded uruk(于勒) to compose the music which was played by kayakeum(加耶琴), the Korean harf having the twelve string. So Uruk composed the twelve of musical piece, his music played an important role for control of district. The aim that Uruk composed the 12 pieces was unification of quasi-independent small states. Ideology promote the growth of the royal authority. Daekaya worshiped the founder, Jeungkeun(正見) of the birth myth of Daekaya. And buddism, confucianism had an influence on ideology of control, too. Silla(新羅), Paekjae(百濟) and Goguryeo(高句麗), this three dynasties were hostile one after another, but at the same time they offered a superior culture to Daekaya. For example, military alliance concluded by Paekjae(百濟) with Daekaya and expenient marriage alliance by Sills(新羅). For profit and independence of itself, Daekaya sent a relief colomn to Silla and Paekjae, sometimes to be enemy, fighted a battle with them. But They provieded a superior culture, that is to say, Buddism, Confucianism, therefore Daekaya gradually progressed ruling system by ideology. On conclusion, in the middle of the 6th century Daekaya was not merely a leader of the united states but in the course to absorb the units, and going on establishing a state with centralized control system. Because Daekaya had a whole control system which was composed of politics, culture, diplomacy and id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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