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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親王 奕訴과 自强運動

Title
恭親王 奕訴과 自强運動
Other Titles
Prince Kung, I-Hsin and Self-Strengthen Movement in China
Authors
김수진
Issue Date
1995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Keywords
공친왕혁소자강운동1860년대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ideas and the movements for Self-strengthen in China that Prince Kung, I-Hsin(恭親王 奕?, 1833-1898) pursued in the late 19th century. After losing the Opium War, China had experienced the severe disturbances in the large. Furthermore, Peiking invasion by Anglo-French Allied forces made Ch'ing Dynasty more unstable. Accordingly, Ch'ing government that considered this situation extraordinary couldn't help contriving the crucial change. It was Prince Kung, I-Hsin who was the first ruler of the Ch'ing government with the idea of Self-strengthen to promote the modernization in China. Prince Kung, at the conspiracy with Empress Dowager T'zu-hsi(慈禧太后), purged the political opponents including Su-shun(肅順) in 1861. After that coup d'e'tat, he was confered the title of I-Cheng-Wang(議政王), then as a Minister of Administration of Government(軍機大臣) dominated the Administration of Government Ministry(軍機處) and Tsungli Yamen(總理衙門). Therefore, such Prince Kung's great power accelerated the Self -Strengthen Movement. Prince Kung's involvement in Peiking Treaty(北京條約) where China made peace with Anglo-French Allied forces, and his contact with the great military strengthen of western countries renewed his viewpoint on the West. He contrived to introduce the military skills from the West, to develop the munitions industries and finally to modernize China. Domestically, to Prince Kung, the primary aim was the suppression of peasanats' uprisings, suppression which was to be supported by scientific knowledges and institutional systems from the West. And then such knowledges and systems would lay a good foundation to confront the foreign invasion. Prince Kung with superior power expedited his plans for Self-strengthen. In 1861, with the support of Gui-liang(桂良) and Wen-xiang(文祥), he proposed the establishment of Tsungli Yamen(總理各國事務衙門), which was not only the first diplomatic organization to officially lead the modernization of foreign affairs but also the key institution to mainly deal with affairs concerning the West. In addition, in 1862, Prince Kung propounded the new plan to establish the educational institute for foreign languages, that is, Tong-Wen-Guan(同文館), then enlarged that institute to teach the western natural sciences, to train the experts and to advance the modem education, by establishing the astronomy and arithmetic school(天文算學館). Above all things, Prince Kung's most primary target was the military Self-strengthen. Although he kept peace with the western countries and in favor of their scientific knowledges, he basically emphasized the military Self-strengthen to cope with the West. Accordingly, he let the Westernization Policy trying to introduce the western technology, drill the troops in due to the modernized way, and purchase and produce the modernized weapons. Conclusively it is obvious that Prince Kung was the first ruler of the Ch'ing government to urge the Self-strengthen with the powerful impetus in the 1860's. And his patronage to the Chinese reformists leading the movements of modernization had a sharp influence on the later Westernization Policy.;본 논문은 19세기 후반 恭親王 혁흔 (1833∼1898)의 自强意識과 自强運動의 실천에 관해 고찰하고자 하였다. 아편전쟁의 패배는 중국사회의 혼란을 더욱 가속화 시켰다. 특히 1860년 영불연합군의 북경침입은 청조통치지배에 동요를 안겨 주었으며 청정은 더 이상 그대로 지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은 형세를 중국의 역사 '수천 년이래 없었던 奇局'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중앙의 정책 결정자들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등장한 대표적 인물이 恭親王 혁흔이었다. 그는 청조황실의 지배층 인물로서는 최초로 자강의식을 가지고 중국의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恭親王은 영불연합군의 북경침입으로 和議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북경조약을 체결하면서 서양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었다. 恭親王온 慈禧太后와 결탁하여 辛西政變을 일으켜 정치적으로 대립해 있던 肅順일파를 제거하였다. 정변 후 恭親王은 議政王의 칭호를 받고 軍機大臣으로서 軍機處와 總理衙門을 주재하며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실권은 自强運動의 추진 기반이 되었다. 恭親王 혁흔이 자강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영불연합군의 북경침입을 통해 서양인식에 변화가 오고, 한편으로는 서양의 강력한 군대를 접하게 되면서였다. 그는 서양의 군사기술을 도입하고 군수공업을 통해 서양을 배워 중국의 근대화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는 국내의 農民起義를 진압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서양 세력과는 우선 和好를 바탕으로 그들의 발달된 기술과 제도를 도입하여 익히고 더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恭親王은 강력한 실권을 바탕으로 自强運動을 추진하였다. 1861년 그는 大學士 桂良, 戶部侍郎 文祥과 聯名으로 總理各國事務衙門의 설치를 건의하였다. 총리아문은 중국 근대사상 최초의 정식 외교기구로 외교근대화에 선두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洋務의 중추적인 기구로 서양에 관련된 제반 사무를 모두 처리하였다. 한편으로 恭親王은 총리아문이 설치되고 전문적으로 외교를 담당하게 되면서 외국어 교육을 위한 새로운 기관의 설치를 건의하였다. 1862년 同文館이 설치되고 이후 단순한 어학교육에서 나아가 서양의 자연과학을 교육시키기 위해 天文算學館을 증설하여 전문인재를 양성하므로써 중국의 근대교육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恭親王 혁흔이 무엇보다도 가장 심혈을 기울여 추진하였던 것은 軍事自强이었다. 그는 비록 서양과는 和好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근본적으로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軍事自强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漢人洋務派들을 지지하며 그들에게 근대적 군사훈련, 무기구매와 제조 등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이상에서와 같이 恭親王 혁흔은 淸지배층의 일원으로서 1860년대 강력한 실권을 기반으로 자강에 힘을 기울였으며 자강과 개혁의지의 표출을 통해 한인들의 洋務運動을 지지하고 보호·육성하였는데 이것은 이후 한인들의 양무운동 추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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