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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時代 漁父圖에 대한 硏究

Title
朝鮮時代 漁父圖에 대한 硏究
Authors
金珠連
Issue Date
1996
Department/Major
대학원 미술사학과
Keywords
조선시대어부도의의중국의 어부도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Author studied on Fisherman paintings in Chosun in this paper. From the early age of China, Fisherman(漁父) had represented recluse men who hide themselves from irritating human affairs. We can find two mainstream of reclusion(隱遁) in Chinese culture.One is Taoistic Reclusion, keeping themselves in peaceful mather nature from chaotic human affairs. The other is Confucian, developing themselves in nature with waiting for the time they accede to important position.. It was Fisherman that was regarded as a good method of reclusion. We can find an example of Taoistic one in the book of prestigious philosopher ZhangZhi (壯者), and represented by Yuan Kuang(嚴光) in Late-Han (後漢) Also Confucian one we can find Jiang, Taigong(姜太公), in Shi-Ji (史記), famous history book written by Si Ma-Chien (司瑪遷) After those examples, many writers criticized chaotic world with the voice of fisherman, many painters painted than as popular subject. We know that there had been an old fisherman painting painted already by Sa-Ye (史藝) who live in Northern and Southern Dynasty Song Dynasty(南北朝) (宋代), after that it became a popular subject to literati , Wang Wei (王維) and Zhang zhi-hua (張志和) and so on, as well as professional painters in Tang dynasty(唐). Those tendency affected “fisher man”'s getting a popular subjuct of literature of posterities. In the painting style, not only recluse but also professional fishermen, who live on fishing, played an important role as a popular subject. After that, 'Fisherman painting' had evolved in various style. Fisherman paintings in Chosun(朝鮮) had developed affected by such Chinese symbolic meanings and painting styles. But we can't certain that when this symbolic means accepted, estimate the origin of Korean Fisherman paintings because of laking in such records and paintings. However we have some records of reclusive concept in Silla age(新羅時代), Some poems fisherman in Korea age(高麗時代) which make us to understand that reclusive fisherman idea had been popular those days.Also we could find a clue that Lim Choon(林春), Korean-age(高麗) writes, wrote a poem that he enjoyed fisherman paintings in folding screen, that made us assume that they already had fisherman paintings those days. It comes to be popular tendency to write on fisherman in Chosun age. Furthermore some literati themselves lived lives of fisherman with retiring to country. This trend was popular on fourteenth to seventeenth century and decreased from 18th century with settlement of politics. And Fisherman paintings changes its characteristics from describing reculuse to genre picture. We cannot define unified style of fisherman paintings because it painted through whole Chosun age. But we classify it by age, from early to middle age of Chosun, Southen Song Ma-Ha School(南宋의 馬夏波의 院體畵風) was prevailing style. In 17th century, and Ming dynasty Zhe-School(明代 浙波의 人物畵樣式) was preferred, which concentrates on figure of people.After 18th century, with pacifying of politics and new ideological trend of 'Practical Study', concept of reclusion changed from political affairs to individual despair originated by class distinction. Also styles got changed to brief touches affected by Yuan Dynasty Wen-Jen-hua(元代 文人畵波) to reflect individual spiritual world. And fisherman appeared more frequently in genre paintings. We can classify fisherman paintings by five according to fisherman's action, 'Hook fishing'(釣漁) was mainly painted through whole Chosun age. 'Group fishing'(漁獵) style which describing lives of humble classes developed in the last part of Chosun age. 'Homeward fisherman'(歸漁) style which has thick Taoistic charaderistics and 'Conversing with lumberjack'(漁樵問答) style which describing talk about philosophy were painted a few around 17th century. It was professional painters that painted fisherman however fisherman thinking was popular subjuct of literati, they scarcely painted because they biased to despise everything except "Songrihak"(性理學)-a branch of confucianism. As a usual, literati wrote mottos or poems on fisherman on the paintings which painted by professional painters, those poems affected forming the styles of fisherman paintings and that helped to transfer of poetric ideas to paintings. Additionally, Fisherman paintings decorated rooms as folding screens, played a role as mind purifying and developing helper, Literati would try to follow the nobility of high-minded men in the paintings. In conclusion, Fisherman had had a equal position as calligraphy, landscape painting and the Four Gracious Plants(四君子) which played a important role to develop themselves.;본 논문은 조선시대의 어부도에 대해서 고찰한 것이다. 예로부터 중국에서 漁父는 복잡한 세상사를 피하여 자연에 隱遁하는 인물의 상징이었다. 중국문화속에서 隱遁은 크게 두가지 성격으로 나뉘어 지는데 하나는 세상의 혼란을 피하여 자연에서 유유자적하며 생활하는 道家적 은둔이고 다른하나는 자연과 더불어 수양을 쌓다가 정치에 입문하여 나라를 평정하고자 하는 儒家적 은둔으로 나뉘어 진다. 道家적인 은둔을 지향하는 어부는 이미 莊子의 글에 수록되어 있고 이러한 어부상은 後漢의 嚴光이라는 인물로 대표된다. 儒家적인 은둔을 지향하는 어부는 사마천의 「史記」에 기록된 강태공을 들 수 있다. 이후 문학과 회화에서는 漁父가 단순히 '嚴光'이나 '姜太公'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隱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서 다루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이미 南北朝 宋代에 史藝라는 화가가 그린 漁父圖가 발견되며 이후 唐代에는 王維, 張志和같이 畵院 이외의 文人畵家도 어부도를 그렸다. 이후 중국회화에서는 은둔을 상징하는 어부도 뿐 아니라 직업 어부의 생활상을 그린그림 모두 활발하게 그려졌다. 조선시대의 어부도는 중국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하였다. 어부에 대한 상징이 언제 전래되었는지는 확인할수 없으며 어부도의 시원 또한 현존작품과 기록의 부재로 추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미 신라시대부터 은일개념이 존재했음을 문헌의 기록을 하여 알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 문집에는 문인들이 어부를 소재로 지은 몇편의 詩가 남아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隱逸을 나타내는 어부의 상징성이 이미 고려시대에도 만연했음이 확인된다. 또한 高麗朝의 文人 林春의 '漁父'라는 詩에 의하면 세속에 초탈한 늙은 어부를 병풍에 그려넣고 감상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고려시대에는 어부도가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 "漁父"는 士大夫의 정치관을 나타내는 상징적 인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漁父" 를 소재로 한 문학과 회화가 발달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自然에 隱居하며 어부생활을 누리는 文人들이 출현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漁父'를 소재로 지은 詩의 내용은 漁父圖의 제작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문인들은 성리학적 가치관 속에서 발생한 회화 末技사상 때문에 직접 詩想을 그림으로 그리는 일은 거의 없었고 대신 화원들이 그들의 이념을 회화로 표현하였다. 그리하여 어부도는 士大夫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회화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實學과 같은 새로운 思想이 들어오고 정치가 안정되면서 지식인들의 정신세계에서 차지하던 "어부" 의 위치가 점점 미약해 지고 또한 "漁父"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의 제작도 줄어들게 된다. 반면 繪畵에서는 은둔자를 묘사한 어부도와 더불어 서민들의 어부생활을 묘사한 그림도 계속 그려졌다. 본고에서는 어부도의 형식을 漁父의 자세에 따라 대체로 다섯가지로 나누었다. 홀로 낚시질하는 모습을 그린 釣漁형식, 고기를 잡고 돌아오는 歸漁형식, 어민들의 생활을 그린 漁獵형식, 어부와 초부가 천지만물의 이치를 토론하는 漁樵問答형식, 그리고 부분만이 남아 형식을 구별할수 없는 기타의 작품들이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장 지속적으로 꾸준히 제작되어진 형식은 釣漁형식이며 서민들의 생활을 묘사한 漁獵형식은 조선 후반기로 갈수록 발전하게 된다. 물고기를 손에 들고 귀가하는 인물이 부각된 歸漁圖와 어부와 초부가 성리학의 철학이론을 토론하는 것을 묘사한 漁樵問答圖는 17세기를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양식적인 면에서 어부도는, 조선初부터 남송 원체화풍이 주를 이루다가 17세기에는 접어들어 明代 절파 양식이 유행하게 된다. 18세기 이후 「고씨화보」가 전래되면서 元代 文人畵風이 본격적으로 수용되며 더욱 조방하고 간략한 필치로 어부의 정신세계를 들어내게 된다. 또한 풍속화속에서 어부를 다루는 경향이 앞시대에 비하여 늘어나게 된다. 天人合一, 修已治人 등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의 은둔관은 임금이 부르면 江湖를 버리고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儒者의 입장을 버리지는 못하였으나 격변하는 정치상황속에서 道家적 은둔의 경향이 늘어나는 변화도 보인다. 漁父圖에서도 언덕위에 앉아 낚시하는 어부는 儒家的 은둔을 지향하는 것으로 또 배 위에서 잠을 자거나 물고기를 들고 귀가하는 모습은 道家的 특성을 지닌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儒家的 어부라도 생활하다 보면 배를 탈수도 있는 것이어서 한가지 자세에 단정적인 의미만을 부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부도는 조선시대 士大夫의 은둔관을 표현하였으며 더불어 士大夫들은 어부도를 보고 고매한 인격을 지닌 賢者를 생각하며 자신의 덕을 닦았으니 이제 어부도는 四君子, 山水, 書藝등과 같이 修身을 위한 도구중의 하나로 자리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조선시대 어부도의 의의라고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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