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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한국 석탄산업 침탈 연구

Title
일제의 한국 석탄산업 침탈 연구
Other Titles
A study on the plunder of Korean coal industry by Japanese imperialism
Authors
김은정
Issue Date
2007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Doctor
Abstract
본 고에는 근대 이후 주목받게 된 석탄자원의 역사성을 대한제국시기와 일제시기를 걸쳐 연구하였다. 근대 이후 석탄은 열차와 선박 등 운송수단의 연료로 이용되었으며 공장의 각종 기계를 가동할 수 있는 동력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따라서 대한제국은 탄광의 자력개발을 천명하고 평양탄광 개발을 위해 프랑스인 기술자를 고용하고 근대적 기기를 구입하여 근대화 추진을 위한 에너지 자원으로서 석탄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제는 평양탄광의 채굴을 강제로 중지시키고 1910년에 평양광업소를 설치하여 평양탄광을 일본해군의 연료창으로 지정하였다. ‘검은 다이아몬드’라고 일컬어지며 고품질을 자랑하던 평양의 석탄은 일본의 해군 함대의 연료용 석탄으로 그 사용이 제한되었다. 이와 같이 대한제국이 근대화 추진과 함께 주목하였던 탄광 개발의 의미와 일제강점 하 한국의 석탄자원이 갖는 의미는 분명한 차별화를 보였다. 일제하 한국의 석탄자원은 한국의 근대화를 추구하기 위한 자원이 아닌 일본의 연료지원을 목적으로 증산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각종 기구 설립과 법령 제정이 남발되었다. 일제는「조선광업령」(1915)을 통해 한국의 광산자원 침탈을 합법화하였다. 광업령 32조에「광업을 위해 필요한 때는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 타인의 토지를 사용 또는 수용할 수 있다」고 하여 광산 개발을 민유지의 토지 수용을 가능하게 하였다. 10조「공익을 해친다고 인정될 때 또는 광업의 가치가 없다고 인정될 때 광업의 출원을 허가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여 총독 임의로 광업권을 허가하지 않을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광업의 개발은 형식적으로 자유로워졌으나 그 개발권은 일본 자본에 제한되어 주어졌다. 석탄자원은 일본이 대자본의 진출을 유도하여 장악 후, 채굴하게 하였으나 일제의 침략목적에 부합하는 채탄의 성과를 보이지 못하자 일제는 朝鮮無煙炭株式會社를 설립하여 평남지역의 무연탄광을 통합하고 증산을 도모했다. 1935년에는 東洋拓植株式會社와 東拓鑛業의 자본이 朝鮮無煙炭株式會社에 대거 진입함에 따라 三菱系의 조선무연탄회사는 東拓이 1대주주인 회사로 변모되었다. 1937년 이후 조선무연탄주식회사는 정관의 변경을 거치고 회사의 목적을 확대하였다. 이제 석탄채굴에만 국한하지 않고, 西鮮鐵道 부설, 元山의 항만 건설 등 조선무연탄을 일본으로 수탈하기에 용이한 기반 산업으로까지 사업의 범위를 확대하였다. 일제하 석탄의 증산 추이는 1911년 121,304톤이었으나 1920년에 291,193톤, 1930년에 884,138톤, 1940년에 5,955,000톤으로 급증하였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는 완만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었으나 1930년대 말 일본의 전쟁침략과 관련하여 석탄수요가 급증하였다. 1911년을 지수 100으로 볼 때, 1940년의 지수는 4,909로서 49배의 증산이 이뤄진 것이다. 1940년대 기록적인 증산을 이루고 있었지만 식민지민은 오히려「石炭配給統制令」에 의해 석탄을 만져볼 수도 없었다. 석탄의 사용용도를 보면 1916년 철도와 선박 등 수탈의 맥관 계통의 사용이 전체의 41.6%를 차지하였다. 점차 공업소비가 늘고 있지만, 1930년대 말 화학공업 중심의 불균형적 공업화가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1940년대에는 관청소비가 19.5%를 점하게 되는데 이것은 강압적인 식민지 체제유지를 위한 연료사용으로서 군대와 관청, 형무소, 경찰소 등의 소비가 격증하게 된 것에 원인이 있었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전시 경제체제로의 전환을 모색하였다. 1938년에 실시된 「國民精神總動員」을 바탕으로 한국인의 적극적인 전쟁 참여를 유도하였다. 더불어 부족한 자원의 증산을 위해 1938년 「重要鑛山資源增産令」을 공포하고 1940년에는 「石炭增産交付金規則」이 공포하였다. 그러나 증산을 위한 각종 법령 제정에도 불구하고 석탄 증산의 한계에 도달한 것을 인식한 일제는 소비 통제를 통해 군수용 석탄 사용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1939년에는 「朝鮮石炭配給統制規則」이 실시되었다. 「朝鮮石炭配給統制規則」은 석탄의 생산업자 또는 판매업자가 조선총독의 허가 없이 임의로 석탄을 판매할 수 없게 규제하였으며 판매업자에 대한 판매계약 수량이 월평균 30톤을 초과할 수 없게 하였다. 또한 석탄을 매매하기 위해서는 총독이 지정한 4개의 배급단체의 단체원으로 가입해야 했는데 그 단체는 朝鮮無煙炭組合, 朝鮮有煙炭組合, 內地炭移入商組合, 輸入商組合이었다. 이 4개의 단체는 단체원에게 ‘販賣指圖書’를 발급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있어야만 석탄의 판매와 구입이 가능하였다. 위의 4개의 배급단체를 통제하는 상위의 단체로 朝鮮石炭配給聯合會가 지정되었다. 이 연합회는 지정된 통제단체의 배급계획을 작성하고 총독의 허가를 받아 배급단체에게 판매허가서를 교부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총독은 통제단체로부터 배급계획을 받고 생산업자, 판매업자들의 배급계획을 제출받아 전체 수요를 결정하였다. 즉 「조선석탄배급통제규칙」은 일반인의 석탄소비를 철저하게 제한하고 군수 산업이 아닌 공장의 연료공급 차단을 목적으로 작용하였다. 1943년에 이르면 일제는 석탄의 더욱 철저한 통제를 위해 「朝鮮石炭配給統制令」를 제정하였다. 일제는 물자가 부족한 상태에서 전쟁을 지속하기위해 에너지원인 석탄의 통제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 법은 「석탄의 생산업자, 수입업자 및 이입업자는 조선 총독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생산, 수입 또는 이입에 관계되는 석탄을 朝鮮石炭株式會社에 매도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조선에서 생산되는 모든 석탄은 조선석탄주식회사에 매도해야하며 조선석탄주식회사는 군수산업에 우선적으로 석탄을 지원하였다. 일제의 석탄 수탈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한국의 석탄노동자가 저임금의 노동현실 아래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1910년대 노동자는 광산노동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식민지에서 육체노동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광산과 부두, 토건노동자의 비율이 일제시기 전반에 걸쳐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제에 의해 공업화가 실시되었다는 1930년대에도 여전히 광산과 토목노동자가 각각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1938년에는 광산노동자가 공장노동자수를 다시 압도하였다. 일제의 공업화 정책이 지하자원을 중심으로 한 수탈산업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저임금을 유지할 수 있는 노동자 공급의 원천지를 해체하지 않기 위해 농업근거의 산업구조를 유지하였다. 1930년대 군수공업화는 진행되었지만 노동자는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말 그대로 ‘살기 위해’ 농촌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半農半勞’의 존재형태가 지속되었다. 반농반노의 존재형태는 노동자의 이동률을 상승시키는 요인이 되었는데, 광산 중에서도 탄광노동자의 이동율이 가장 높았다. 평남의 무연탄산과 함북의 유연탄산을 비교할 때, 1929년 조사에 의하면 평남의 무연탄산의 이동률이 228%, 함북의 유연탄산이 51%로 나타났다. 이것은 무연탄과 유연탄의 노동조건 차이보다는 농업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는 평남의 무연탄광과 산악지역인 함북의 유연탄광의 위치가 이동률의 차이를 낳았다. 평남의 주요 무연탄광을 통합하여 설립된 조선무연탄주식회사 또한 낮은 임금을 유지할 수 있는 계절형 노동자를 꺼리지 않았다. 탄광에서의 노동운동은 1930년의 咸興炭鑛 파업과 1931년의 鳳儀, 鷄林, 會寧탄광 파업과 1934년의 三神 탄광 파업이 있었다. 함남의 함흥탄광 파업은 노동자의 노동단체 설립을 요구조건으로 제시하는 등 1920년대 발전된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영향을 받아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파업을 준비 대처하였다. 그러나 1931년 鳳儀, 鷄林, 會寧탄광은 우발적으로 발생하였으며 광주의 강력한 대처에 성과 없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1929년부터 집중적으로 발생한 파업에 대비하여 광업주는 노동단체 결성을 막고 주모자 정보를 광산주 간에 공유하는 등 철저한 단속을 강행하였다. 또한 1930년대 이후 일제의 침략전쟁이 가시화되면서 군수물자 생산을 위한 석탄의 통제가 강화되어 노동운동으로 노동여건을 개선할 여지는 사라졌다. 일제하 탄광노동자의 파업은 민족적 모순과 계급적 모순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으면서 단순한 노사간의 갈등이 아닌 식민지 노동자와 일제 자본가와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제하 탄광노동자의 파업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서 일제의 자본에 저항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식민지 노동자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족문제의 해결이 선결과제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1920년대 발전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과의 연합으로 성립된 신간회는 민족운동 세력이 일제에 저항할 수 있는 정신적인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그 결과 1930년대 초 일제에 저항하는 활발한 노동운동이 발생할 수 있었다;This study is designed to examine the historical meaning of a coal resource in the period of Daehan empire(大韓帝國) and Japanese imperialism. Since modern era a coal has become a fuel of transportation such as a train and a ship. The value of a coal has been acknowledged as a power supplier of various kinds of machines. Thus Daehan empire elucidated self development of coal mines and used a coal as an energy resource of modernization while employing French engineers to develop a Pyungyang coal mine(平壤炭鑛) and procuring modern machineries. Nevertheless the exploitation of the Pyungyang coal mine was forced to stop by Japanese imperialism after the Russo-Japanese war in 1905 and was assigned as a fuel warehouse for Japanese navy in 1910. The use of the Pyungyang coal which was admired as a 'black diamond' and boasted of a high quality was restricted as a fuel for only Japanese navy. There was a clear distinction between the meaning of the coal mine development which was carried out side by side with the Daehan empire's modernization movement and the meaning of the coal resource under the occupation of Japanese imperialism. The Korean coal resource under Japanese imperialism was not a resource to propel Korean modernization but a munitions fuel for militaristic Japan. Various institutions were established and all sorts of laws were enacted to achieve the goal. Japanese imperialism legalized the plunder of the Korean mine resource through 「Chosun Mining Decree(朝鮮鑛業令)」(1915)". Article 32 of the decree stated that 「If necessary for mining, others' land could be used and expropriated with the permission of the Chosun governor-general」 and granted the expropriation of the private land to develop mines. Article 10 of the decree stated that 「When public interest is detrimental or mining is worthless, application for mining can not be granted」 and confirmed that the right of mining was at the governor-general's discretion. While mine development was unrestricted for form's sake, the right of the development was restricted to Japanese capitals. After Japanese major capitals were induced, the coal resource was grasped and exploited by them. Since the exploitation output was inconsistent with the expectation of Japanese imperialism, she established a 'Chosun Anthracite Corporation(朝鮮無煙炭株式會社)', unifying anthracite mines in Pyungnam province and contrived to increase the output. Since 1937 the corporation modified the statute and expanded the objective of the corporation. The corporation was not confined to coal exploitation any longer, but expanded the scope of its business to build infrastructures such as a Western Korea Railway and a Wonsan port to facilitate plundering Korean anthracite . The quantity of the coal production under Japanese imperialism increased from 121,304 tons in 1911 to 291,193 tons in 1920, 884,138 tons in 1930 and 5,955,000 tons in 1940. While it showed slow growth of the quantity in 1910s and 1920s, it displayed exponential growth in late 1930s influenced by the Japanese aggressive war. If the index of the coal production quantity in 1911 were 100, 1940's would be 4,909 which means 49 times increase. Whereas there was a record-breaking growth in 1940s, colonial people could not even touch coals owing to 「Coal Distribution Control Decree(石炭配給統制令)」. In terms of the purpose of the coal use, 41.6% of the coal was to make blood-vessels such as a railroad and a shipping in 1916. Even though an industrial use increased gradually, an unbalanced industrialization centering around a chemical industry accounted for a major proportion in late 1930s. The coal use of the government offices such as militaries, authorities, prisons and police offices accounted for 19.5% in 1940s to maintain the coercive colonial constitution. After the Chino-Japanese war in 1937, Japanese imperialism groped for the conversion into wartime economic structure. In order to increase the production of deficient resources, Japanese imperialism promulgated 「Major Mining Resources Production Increase Decree(重要鑛山資源增産令)」 in 1938 and 「Coal Production Increase Subsidy Rule(石炭增産交付金規則)」 in 1940. Despite the enactment of various laws for the coal production increase, Japanese imperialism realized the increase had reached the limit and attempted to secure munitions coals through consumption control. Thus「Chosun Coal Distribution Control Rule(朝鮮石炭配給統制規則)」 was enforced in 1939. The rule regulated producers or merchandisers not to sell coals without the permission of the Chosun governor-general and sales volume of the merchandisers should not exceed an average of 30 tons per month. In order to trade coals, anyone must have participated in one of the 4 distribution organizations appointed by the governor-general which were 'Chosun Anthracite Union(朝鮮無煙炭組合)', 'Chosun Bituminous Coal Union(朝鮮有煙炭組合)', 'Inland Coal Trade Union(內地炭移入商組合)', 'Import Trade Union(輸入商組合)'. They could issue a 'Sales Guide Manual(販賣指圖書)' to their members with which they could sell and buy coals. Also 'Chosun Coal Distribution Union(朝鮮石炭配給聯合會)' was designated as a superior entity to control the 4 distribution organizations. The Union made distribution plans for them and granted sales licenses to them with the permission of the governor-general. The distribution organizations, producers, and merchandisers submitted distribution plans to the governor-general who decided the whole demand. That is,「Chosun Coal Distribution Control Rule(朝鮮石炭配給統制規則)」 restricted the coal consumption of the ordinary people thoroughly and intercepted to supply fuels for factories except a munitions industry. In 1943, Japanese imperialism enacted 「Chosun Coal Distribution Control Decree(朝鮮石炭配給統制令)」in order to control the coal industry more thoroughly. Japanese imperialism reinforced the coal control to continue the war in a condition of deficient goods supplies. The decree stated that 「coal producers, importers and merchandisers must sell coals to 'Chosun Coal Corporation(朝鮮石炭株式會社)' by order of the Chosun governor-general」. All of the coals that were produced in Korea must be sold to 'Chosun Coal Corporation' and the corporation supported the munitions industry first of all. It was possible for Japanese imperialism to plunder Korean coals since there were Korean coal miners in a low wage labor condition. Laborers of 1910s were made up of mine laborers as the central figure. In colonial Korea where capitalism was not developed yet, the proportion of the laborers in mines, ports and construction fields who had rather easy access to them with a physical labor force accounted for a high rate throughout the period of Japanese imperialism. Even during 1930s when the industrialization by Japanese imperialism was carried out, mining and engineering laborers accounted for over 30% respectively. In 1938 the number of the mining laborers surpassed that of the factory laborers again because the industrialization policy of Japanese imperialism concentrated on the plunder itself centering around underground resources. Japanese imperialism maintained the industrial structure based on agriculture in order not to dismantle the source of the labor supply to preserve the low wage condition. Though munitions industrialization was in process in 1930s, laborers existed as a form of 'half-peasant, half-laborer' who had to maintain the relationship with farm in order to so-called 'survive' in the coerce labor situation. The existence of 'half-peasant, half-laborer(半農半勞)' resulted in the increasing movement rate of laborers and that of the coal mine laborers was the highest one. According to the 1929 research, the movement rate of the anthracite mines in Pyungnam marked 227% and that of the bituminous coal mines in Hambuk marked 51%. The gap of the movement rate resulted from the different locations of the anthracite mines in Pyungnam which were based on agricultural regions and the bituminous coal mines in Hambuk which were near to mountainous regions rather than different labor conditions. In terms of labor movements in coal mines, there were strikes in a Hamheung(咸興) coal mine in 1930 and Bongeui(鳳儀), Kyelim(鷄林), Hoiryung(會寧) coal mines in 1931. Strikers in the Hamheung coal mine was influenced by the nationalistic movements and socialistic movements of 1920s and went on continuously systematic strikes requesting the establishment of a labor union. However the strikes in Bongeui, Kyelim, Hoiryung coal mines took place accidentally and were settled fruitlessly due to the powerful countermeasures of the coal mine owners. In order to confront with the strikes which took place intensively in 1929, coal mine owners blocked the establishment of labor unions and kept strict orders sharing the information of the strike leaders. As Japanese imperialism materialized an aggressive war after 1930, the coal control was reinforced to provide munitions and the room to improve the labor environment through labor movements was disappeared. The strikes of coal miners under Japanese imperialism connoted not only national contradiction but also class contradiction. They also connoted a conflict between colonial laborers and Japanese capitalists rather than a simple labor-management dispute. Hence the strikes took place with a form of resistance against Japanese capitals as a part of national movements. In order to solve the problems of colonial laborers, the settlement of national problems was a preconsideration. Shinkanhoi(新幹會) which was established by the coalition of nationalistic powers and socialistic powers inspired a spiritual pride to resist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As a result active labor movements could take place in early 193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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