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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산 이유원(橘山 李裕元) 연구

Title
귤산 이유원(橘山 李裕元) 연구
Other Titles
A Study on Gyulsan Lee Yu-Won: With a focus on his tastes in culture and arts
Authors
유영혜
Issue Date
2007
Department/Major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본고는 19세기 문인인 橘山 李裕元(1814~1888)의 생애를 살펴보고 그의 삶과 문학을 문화, 예술사적 관점에서 고찰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귤산 이유원은 전권대신으로 제물포 조약에 조인한 정치인으로 또는 악부시를 많이 남긴 작가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정치인이라기보다는 19세기의 문화, 예술을 사랑한 지성인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며 그의 악부시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고는 귤산 이유원이 가지고 있는 문화, 예술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발현되었으며 그가 19세기 문화 예술사에서 어떤 의의를 지니는 지를 주목해보았다. 기존의 귤산에 대한 평가는 정치인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최근 임하필기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면서 그의 다양한 면모가 드러났지만 그의 삶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는 여전히 부족하다. 따라서 그의 생애와 師友관계를 통해서 그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어떤 관직생활을 보냈고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지를 밝혀보았다. 또한 귤산이 관심을 갖고 참여했던 집안의 가승 및 족보 정리 사업이 그의 주체적인 역사 인식의 한 단면이라는 것과, 변화하는 시대인식과 현실인식 속에서 그가 끝까지 잃지 않은 것은 우리 민족의 문화, 예술에 대한 관심이었으며 그것은 그의 문학 작품 전반의 배경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귤산은 이른 나이에 자연으로 돌아갈 것에 뜻을 두고 가오곡에 별장을 마련하였다. 가오곡은 귤산이 정치적 부침과 급변하는 정세를 피해 은거할 수 있었던 곳으로 요직에 임명될 때마다 수차례씩 거절하면서 돌아가려고 했던 곳이었으며 귤산이 수많은 저술을 완성한 곳, 19세기 문화가 재현된 곳이었다. 그는 당대의 이름난 문인들에게 자신의 수장비후기를 지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이것은 귤산이 당대의 명사들의 글을 빌려 자신이 젊어서부터 뜻을 두었던 은거의지를 더욱 강하게 드러낸 것이며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은거를 인정받고자 했던 의도가 담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가오곡 주변에 사는 문인들과 여러 번의 시회를 가졌던 것은 19세기 별장경영이 문화를 교류하는 장으로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을 통해서 이유원이 의원을 경영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획득할 수 있었고 당대의 문화에 관심을 갖고 이를 실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귤산이 가오곡에서 가장 관심을 두었던 것은 책과 차였다. 18,19세기의 경화세족들은 장서를 그들 특유의 생활취미 내지는 문화로 정착시켰는데 귤산 역시 가오곡에 만권루를 짓고 상당한 양의 장서를 보유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장서를 통해 형성된 고증과 박학이라는 당시의 학풍은 귤산의 많은 저술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고 동시에 보다 넓고 유연한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일조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차라는 것은 단순한 기호나 취미의 문제를 넘어서 내밀한 정신세계의 문제이다. 귤산은 차를 통한 선승과의 교유를 통해 성리학적 사고에 얽매이지 않고 유, 불, 도를 모두 받아들여 경직된 세계관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귤산의 다양한 문화 활동은 무엇보다도 예술에 대한 관심으로 집중되었다. 특히 그는 그림과 음악에 조예가 깊어 19세기 후반 예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귤산은 글을 짓는 일과 그림을 그리는 일이 다른 뜻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파악 하였으며 생동감 있는 글을 짓고 정신이 살아있는 그림을 그리려면 이러한 원리를 반드시 깨우치고 있어야 한다고 하여 詩, 畵동일의 원리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詩에서는 實景을 강조하고 文에 있어서는 實語를 강조하여 사물의 참모습을 드러내고자 한 귤산의 詩文관과 일치한다. 또한 귤산은 표암과 자하의 맥을 이어 조선 후기 예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표암과 자하가 추구했던 문인화와 진경산수의 정신을 이어 받았다는데도 의의가 있지만 항상 창조적인 방법으로 예술에 자신만의 개성이 나타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의 새로운 예술관을 보여준다. 영정에 자의식을 반영한 것도 그런 의미에서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다양성과 작품에 담고 있는 개성은 19세기 후반 예술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리라 생각한다. 귤산은 우리나라의 악부에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창작하였는데 이것은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해독하기 어려워 결국은 사라져 버리고 마는 民風을 보존하기 위한 귤산의 노력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19세기에 오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장단의 틀에 얹어서 노래하는 관습이 보편적으로 확대되고 장단의 명칭이 생겨나는데, 귤산은 이러한 19세기의 음악문화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활용하여, 7언의 일정한 창법으로 노래화가 가능하도록 악부를 창작하였다. 따라서 귤산은 우리나라의 음악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토대로 내용은 물론 기능까지 고려하여 악부를 창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음악과 함께 우리나라의 춤에 관심을 갖고 악부를 창작하였는데 악장을 중심으로 춤을 재현해 냈고 특히 복식에 대한 고증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며 당시의 춤을 정확히 재현해 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굴산의 문화적 바탕은 비록 경화세족의 것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결코 성리학적 사고에 얽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유, 불, 선을 넘나드는 학문의 다양성을 기반으로 다양한 인간관계를 확장시켜 나갔다. 이는 문화를 사랑하며 적극적으로 즐길 줄 알았던 조선후기 학자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귤산은 조선 후기 문화소통운동의 한 담당층으로서 사대부문화를 고수하던 일부 문인들과 근대 지향적 움직임을 보였던 대중문화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충실히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예술에 대한 귤산의 관심과 참여, 악부시의 창작은 19세기 후반 대중문화 형성에 양반계층이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The purposes of this study were to investigate the life of Gyulsan Lee Yu-won, a 19th-century literary man, and to examine his life and literary works from the perspective of culture and arts history. Gyulsan Lee Yu-won was widely known as a politician to sign the Jepulpo Agreement as a subject with great power and to leave many Akbu poems. But a closer examination will tell that his life was dominated by his features as an intellectual man that loved the culture and arts of the 19th century rather than as a politician, from which perspective his Akbu poems should be reviewed. Thus this study focused on how his interest in culture and arts was implemented and what significance he had in the history of the 19th culture and arts. The previous evaluations of him were mostly about his accomplishment as a politician. Although other different aspects of his have been identified with ongoing research into his Limhapilgi, there is still shortage of a comprehensive understanding of his life. In the study, his life and peer relations were reviewed to see in what kind of environment he was brought up, what his office life was like, and by whom he was influenced. It's also confirmed that his project to succeed his family and arrange its genealogical table in which he had huge interest reflected his independent attitude towards history and had close relationship with his ongoing concern with the land and culture of the nation. He prepared for a country house in Gaogok at an early age with his returning to it in his mind, which proves that he place more value in writing books in a remote country than holding office in the central government. He asked the contemporary prominent authors to write a kind of epitaph for him, which clearly shows his determination for a reclusive life at an early age by the help of the words from the prominent authors, as well as his intention to have his reclusive life acknowledge by the people. He also held many poetry parties with the literary men living around Gaogok, which means that his country house found a new meaning as the place for the authors to make exchanges in the 19th century and that he had diverse experiences by running the assembly and practiced his interest in the contemporary culture. What he most focused on in Gaogok were books and tea. In the 18th and 19th century, the Gyeonghwa nobles settled down books as their unique hobby or culture. It's estimated that he also had a huge collection of books in the Mangwonru of Gaogok. The academic atmosphere of those days characterized by historic research and great learning seem to have exercised major impacts on his active writing and made a contribution to his forming wide and more flexible views of the world. Tea is a matter of the private spiritual world beyond a simple hobby or taste. Sharing ideas with the Zen priests through tea, he escaped from the framework of Neo-Confucianism and the rigid views of the world embracing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His diverse cultural activities were focused on his interest in arts. In particular, he had great knowledge of paintings and music and claimed an important spot in the arts history of the 19th century. Understanding that writing and painting were not different from each other in meanings, he argued that the principle must precede any acts of writing a living story or painting a picture with a living spirit following the principle that poetry and painting were the same. That matches his views of literature as he emphasized actual landscape in poetry and actual words in literature to reveal the true aspects of things. Succeeding Pyoam and Jaha, he also claimed a critical position in the artistic world of the latter days of Chosun. It's significant that he followed the spirit of the literati paintings and true-view landscape paintings pursued by Pyoam and Jaha. But what's more significant is that he made efforts to express his own personality in his works by seeking out creative methods all the time, which indicates that he adopted a new artistic view in the latter days of Chosun. His reflecting his self-consciousness in his portrait can be understood in the same vein. The diversity he pursued and his personality in his works will offer crucial clues to an understanding of the arts history in the latter part of the 19th century. With interest in Akbu of Korea, he continuously made Akbu works, which was part of his efforts to preserve the folk custom that's hard to interpret after a while and would go into oblivion in the end. Entering the 19th century, there appeared a new universal custom for everyone to sing songs on an easily apprehensible frame of beats, which would soon get titles. Accepting and utilizing the changes to music in the 19th century, he created Akbu works the enabled singing in a certain technique of 7-eon, which proves that he took into account not only the contents but also the functions based on his enormous affection and interest in the traditional music. He wrote Akbu works with his interest in dances in addition to music. In particular, his historic research into the traditional clothing played a key role in making the works more perfect and reproducing the dances of those days. His consciousness of culture was based on the culture of the Gyeonghwa nobles but grew further going through the process of establishing interpersonal relationships with diverse people of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recognizing the diversity of literature, and evolving into a scholar loving and enjoying the culture rather than a typical literary man in late Chosun obsessed with the Neo-Confucian ideas. He served as the bridge between a group of literary men that stuck to the gentry's culture as one of the classes in charge of the culture communication movement in late Chosun and the popular culture moving towards the modern orientation. His interest and participation in arts along with his creations of the Akbu works claims significance in that it shows the nobility played certain roles in creating the popular culture in the latter part of the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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