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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蓮 池雲英의 生涯와 作品世界

Title
白蓮 池雲英의 生涯와 作品世界
Other Titles
A Study on the Life and Works of Baek-Ryun Ji Un-Young(白蓮 池雲英)
Authors
변경화
Issue Date
2007
Department/Major
대학원 미술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Since Western painting was introduced via China, modern Korean art has been suffered by confrontation between old traditional party and renovation party, therefore startedto establish new tradition in order to satisfy needs of time for modernization. In this period, Oh Se-Chang(吳世昌), Ahn Joo-Shik(安中植), and Cho Seok-Jin(趙錫晉) are known as representative artists of pictures and calligraphic in modern artists' world, while Baek-Ryun Ji Un-Young(1852-1935), who described change of the times as an art in the dawn of modern art, was not regarded as important because he is deviated from the main stream of modern art circles. However, Ji Un-Young played an important role in entering from old tradition into 'modern', for example, by applying photography to a painting. This fact would affect an interpretation of modern art in Korea and he seems to be evaluated with a viewpoint of history of art. His art and work, which is seem to be varied with his political status, should be investigated with his photograph data, collection of works, poetry, calligraphy and paintings, etc. Unfortunately, many works of pictures and calligraphy in relation with him were remained to identify whether his or not. In addition, a theory or rumor about him made it difficult to understand him precisely. Ji Un-Young was active in pictures and calligraphy between the late Chosun Dynasty and beginning of the Modern period. He is also a photographer and politician. In the history of photograph, he was just treated as a person who introduced modern photography. History of politics describes him as a person, who is related to the political event for attempted assassination of Kim Ok-Kyun(金玉均) on order of King Gojong(高宗) et al. In the aspect of calligraphy and paintings, he has been regarded as one of traditional painters utilizing literati painting and official painting style of the Southern Song and has not been treated as a painter discovering new modern style of painting. However, with extending general point of view, a lot of his works is well circulated at the market and become to be valuable. This may imply his works should be indicated as certain factor of modern arts. In addition, based on the fact of exchanges between Ji Un-Young and 'Yuk-kyo Shisa(六橋時社)' associate, he seemed to succeed to Kim Chong-hui(金正喜)'s Ch'usa school in another aspect. This will provides new point of view on the history of modern art. He introduced the advanced photography from Japan and exchanged with literati artists through trip or study in China. Probably, when he received the advancing Chinese style, he took old-traditional copy method, which is transitional form between tradition and renovation. However, his works of art should be evaluated again because he did actively play a role of 'connector' between old and new tradition. Considering these facts, present thesis tried to identify his new side in modern arts circles, which would be accomplished by collection of data and works related to him and organic analysis. This paper will introduce unveiled data a document that he is the first Korean to photograph portrait of 'King Gojong and Royal family', a photographic copperplate of 'Chunji of Bakdoo Mountain that is 10 years earlier than that of DongA Newspaper', and a full photograph of Ji Un-young wearing civilized clothes. Ji Un-Young should be a major person in Korean civilization party based on the fact that he work as an official for civilization and actively made exchanges with 'Yuk-kyo Shisa' associate. Nevertheless, his political and social activity was over after the event of attempted assassination of Kim Ok-Kyun and resultant exile. After then, he concentrated on working in calligraphy and paintings at the age of forty. Many of his paintings described a life of hermit, which implies his political failure, and seem to return to the ideal of old tradition. After he stopped operating a photo studio due to economical difficulty and political environment, he did actively accept a viewpoint and style of painting of his teacher, 'Gangwi' who is a pupil of Kim Chong-hui. He produced as landscape painting and , etcas figure painting and continued until the age of eighty. Besides, 'a horse' applied by "photograph-type shading method" seems to introduce Western style and modern style of art through a pictorial such as Dian-shi-zhai cong-pu(點石齋叢譜) and Zhi-zhong-hua(詩中畵) et al. incoming from Shanghai. In all, Ji Un-Young's achievement for the history of photograph is the first man to introduce the modern photography and the first photographer who photos 'King Gojong and Royal family' and 'Chunji of Bakdoo Mountain'. In these facts, his modern capability can be observed. In the history of painting, his paintings shows a traditional ideal for literati of erudition endowed in poetry, calligraphy, and painting through 'title poetry' and also shows how new painting style such as photography is applied to. Through this study, we tried to overcome fragmentary assessments on Ji Un-Young and properly evaluate him as an artist who was active in modern art circles.;西洋列強の影響で、韓国の近代美術は歴史的な変化を受け、近代化への時代の要求に備え、新たな伝統と改革を試みた。この時代の代表的な書画者は吳世昌, 安中植, 趙錫晉であり、新時代の変化を芸術として表した白蓮 池雲英(1852-1935)は主流ではなく、また近代美術史の中で重要な人物ではないと言っても過言ではない。しかし池雲英の生涯に渡って現れた芸術世界は旧朝鮮の伝統から近代への遷移する機会を提供した芸術家として非常に重要な意義を持つと考えられる。それから彼の多様な体験の中で写真術の導入は、近代美術の違う一面が把握できる要素を提供しており、韓国近代美術の色々な角度から評価できる人物と考えられる。池雲英の芸術と創作方法は現在残っている写真資料、文集、詩、書、畵に基づいて判別できると思うけれども、伝承している多くの書画作品の真偽判定や政治的な説などが原因で、正確な彼の生涯を理解することは難しい状況である。 池雲英は朝鮮末期から近代初期まで活躍した書画者および写真者であり、政治家でもあった。写真史からみると、近代写真術を導入した先覚者として知られている。また、近代政治史では高宗の密事により進行した金玉均暗殺未遂事件と関連して言及されただけで詳細な行跡は解らない。絵画史的には文人絵風や南宋院體畵風を駆使した伝統画家としての面だけ記述され、近代新絵風の開拓の面とは距離がある。しかし、このような絵画史的注目とは別として、池雲英の現存する種々の作品は美術市場では価値が認められ、近代美術の需要と関連して重要な要因であるだろう。また池雲英は六橋詩社同人らとの交流を通じて秋史-金正喜画派の伝統を継承したと見られる。 従って、池雲英の日本の先進写真術の導入や中国旅行および留学から文人だちとの交流は、新文物と新伝統を受入れたことで見直すべきである。勿論、中国絵風の受容する方法として、旧伝統的な臨摸を利用した点はあるが、新旧文化を折衷したと見なすと‘橋梁的 役目’を果たし、彼の作品を再評価する価値が有する。これらを主知して本論文は彼に関する新しい事実「たとえば韓国人最初で高宗と王室家の肖像写真を撮影した記録、東亜日報所有の現存する最初の白頭山写真よりも10年も早く彼が撮ったように見える白頭山天池の写真銅版や”開花”服装の池雲英全身写真ガラス原型などを発見することなど」を見つけ出し、彼の新たな面を発掘して行った。 政治的では金玉均暗殺事件失敗前までは、開花官僚 統理軍國事務衙門 主事として政治活動し、六橋詩社同人と開花派人達との社会交流も積極参加した。しかし、池雲英のこのような活動は高宗の密命を受領して行った金玉均暗殺の失敗や異郷生活後、政治への復帰を試みたが挫折し、社会的な活躍は幕を閉じた。その後、40代からは書画に専念し、自分のことを反映した隱居師の生活を材料とした多数の絵描作品を制作した。これは文人伝統の隱居思想を継承し、旧伝統への回帰を示す。また、経済困難と政治的状況により、写真館の運営を中断し、秋史 金正喜の弟子であった師匠姜瑋の思想と画派を積極的に受入れ、山水画では<梅花書屋圖>,人物画では<東坡先生笠屐圖>, <前後赤壁賦圖>, <達摩圖>などを製作し、80代まで創作活動を続けた。この間、写真術の影響が見える‘写真映像式陰影法’の「馬の絵」などには、西洋的な表現や中国上海から輸入した<點石齍叢譜>, <詩中畵>などの画報に見える近代画風の受容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た。 池雲英の写真史的な業績は‘最初・最古’のような修飾語が付く写真術の導入、高宗と王室家への写真撮影や白頭山天地などの写真作品から彼の才能を見ることが出来た。書画では絵に示した題詩を通って、詩書畵三絶と言う文人伝統観が現れており、また新しい画風の受容から写真術をどのように適用したかも把握できる。 このような考察を通して、新旧過度的な時期の芸術家としての池雲英の生涯と作品を研究し、今まで断片的な記述で留まった彼に対しての評価を統括的な芸術家として評価しようと試みた。;서구열강의 東漸으로 한국의 근대미술은 역사적 격동을 겪으며 근대화의 시대적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구전통과 개혁의 대립 속에서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 새로운 전통과 개혁을 시도했다. 이 때 근대적 전환의 운명 속에서 전 시대와 다른 근대미술의 개창 속에서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예술로 나타냈던 白蓮 池雲英(1852-1935)은 근대화단에서 대표서화가로 거론되는 吳世昌, 安中植, 趙錫晉의 주류적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던 화가로 한국근대미술사에서 중점적인 위치를 차지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지운영의 전 생애에 걸쳐 나타난 예술세계는 조선말기의 전통에서 '근대'라는 시간으로 진입하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예술가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음은 물론, 그의 다양한 신예술 체험 중 사진기술의 도입은 근대미술 해석의 또 다른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요인을 제공해 주고 있어 한국근대미술의 다양한 시각 속에서 입체적인 조명에 접근할 수 있는 인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정치적 입지의 격변에 따라 삶의 목적과 예술관을 드러냈던 지운영은 현재 남아 있는 사진자료, 문집, 詩·書·畵 등을 통해 그의 예술과 창작태도를 고찰할 수 있는데, 전칭되는 서화 작품의 수는 꽤 많이 전해지고 있어 그 진위의 판별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건에 연루된 각종 설 등도 그의 생애를 정확히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는 실정이다. 지운영은 조선 말기에서 근대 초기에 걸쳐 활동했던 서화가였을 뿐만 아니라, 사진가이기도 하고 정치가이기도 했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간 인물이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 온 그에 대한 연구는 근대 사진술을 도입한 정도로 사진사에서 다뤄져 왔고, 또한 정치사적으로 지운영은 高宗과 사대당 정부의 密命에 의해 진행된 金玉均 암살 계획 사건과 관련된 인물로 소략하게 기술되는 정도에 그쳐 더욱 더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이와 달리 많은 서화작품을 남기고 있는 화가적 면모는 작품양식의 특성 상 문인화풍과 남송원체화풍이 드러난 전통화가로서의 인지되어 있을 뿐, 근대 신화풍의 개척적인 면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각을 벗어나 근대시기 새로운 동향 중 시각의 보편적 확대라는 측면에서 보면, 지운영의 현존하는 상당수의 작품들이 미술시장에서 유통되어 대중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음은 근대 미술품 수요와 관련하여 중요한 요인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지운영은 여항문인인 六橋時社 동인들과의 교류했던 행적은 추사 김정희 화파의 단절된 전통을 또 다른 측면에서 계승했다고 볼 수 있어 근대전통의 문제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주고 있다. 따라서 지운영의 예술 행적 속에 나타난 일본 선진 사진술의 도입과 중국 여행 및 유학으로 문사들과의 교류 등은 신문물과 중국의 신전통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새롭게 보아야할 것이다. 물론 중국 화풍의 수용에서 구전통적인 임모 방식을 취했던 점은 전통과 개혁의 과도기적 양상을 보이고 있으나, 신구문화의 절충적이면서 ‘橋梁的’인 면모를 고찰해 볼 때, 그의 작품에 대해 평가는 새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점을 주지하여 본 논문은 신문물을 수용한 지운영의 사진과 관련하여 한국인 최초로 고종과 왕실가 초상 사진을 촬영하였다는 기록과 동아일보 소장의 현존하는 최초의 백두산 사진보다도 10년 정도 이른 시기 그가 찍은 것으로 보이는 백두산 천치 사진동판, 아울러 개화 복장 지운영 전신사진 유리원판 자료 등의 새자료 발굴에 애쓴 바탕에서 그의 새로운 면모를 추적해 나갔다. 정치적으로도 김옥균 암살 사건 실패 이전까지 개화 관료 통리군국사무아문 주사로서 활동하는 한편, 육교시사 동인과 개화파 인사들과의 적극적으로 교류했던 지운영은 결국 근대 ‘開化’세력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高宗의 密命을 받고 진행한 金玉均 암살 계획의 실패로 인해 유배 생활 후 정치적 재기는 더 이상 실현할 수 없었던 좌절에 따라 사회적 활동은 중단된다. 그 후 그의 나이 40대부터 서화 작품 활동에 전념하면서 은일지사의 삶을 소재로 한 다수의 회화작품은 그의 현실적 삶에서 경험한 정치적 좌절이 ‘隱居師’로서 반영되고 있는데 이는 문인전통의 은일사상과 맥을 같이하는 구전통의 이념으로 회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그는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상황에 의해 사진관 경영을 그만두고, 추사 김정희 제자였던 스승 강위의 사상과 화파를 적극 수용하며 산수화로는 <梅花書屋圖>, 인물화로는 <東坡先生笠屐圖>, <前後赤壁賦圖>, <達摩圖> 등을 제작하며 80세가 넘도록 계속 창작하였다. 한편으로 사진술의 영향이 보이는 ‘사진영상식 음영법’의 말그림 등에는 서양식 표현과 중국 상해에서 유입된 『點石齋叢譜』, 『詩中畵』등의 화보를 통한 근대기 화풍의 수용의 일면을 고찰할 수 있다. 결국 지운영의 사진사적 업적은 ‘最初·最古’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사진술 도입, 고종과 왕실가의 사진촬영, 백두산 천지 촬영 등에서 그의 근대적 역량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詩書畵 三絶의 문인 전통관은 산수, 인물, 말 등의 회화에 나타난 題詩를 통해 추사 김정희 화파의 筆意를 계승하고자한 조선 문인 전통관도 드러나게 되었고, 새로운 화법 수용에서 사진술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지운영은 理想을 추구하는 ‘중세적 작가상’이기보다는 근대 변혁기를 거치면서 정치·사회적인 현실적 좌절과 문인 전통을 잇고자한 창작태도가 근대미술의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어느 정도 파악 되었고, 이러한 고찰을 통해 본 논문은 한국근대미술의 새로운 시각을 시도하고자 신구 과도기의 예술가로서 지운영의 생애와 작품들을 연구하여 지금까지 단편적 서술에 그쳤던 것에서 더 확대해 나아가 총체적인 예술가의 면모를 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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