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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ontributor.advisor김임자-
dc.contributor.author김성희-
dc.creator김성희-
dc.date.accessioned2016-08-25T04:08:37Z-
dc.date.available2016-08-25T04:08:37Z-
dc.date.issued2006-
dc.identifier.otherOAK-000000012826-
dc.identifier.urihttps://dspace.ewha.ac.kr/handle/2015.oak/179223-
dc.identifier.urihttp://dcollection.ewha.ac.kr/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0012826-
dc.description.abstract陰山山脈 이북에서 흥기한 拓跋部는 음산산맥 이남 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해가는 과정에서 당시 河北 일대의 강대 세력이었던 後燕과의 정면 대결이 불가피하였다. 遊牧에 유리한 山西 高原에 근거지를 확보했던 代國으로써는 河北의 지속적인 식량 공급이 가능한 배후지로써의 역할에 주목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京師와 河北 지역간의 太行山脈이라는 자연지리적인 장애로 인해 두 지역간의 교통이 용이하지 않았으며, 대국이 직접 후연에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拓跋珪의 후연 공격은 음산산맥 일대의 여러 부족들에 대한 복속을 통해 전쟁 수행에 필요한 병력과 兵馬를 확보한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대국은 후연 정벌 당시 그들의 다소간의 저항에 직면했지만 후연 조정 내부의 분권적인 통치 구조상의 맹점을 역이용해 河北 진출에 성공하였다. 北魏는 후연 정벌 직후 다수의 ‘新民’을 경사로 遷徙시켰고, 경사와 河北을 연결하는 도로의 건설로 河北 일대의 反胡族的인 정서에서 비롯된 국지적인 소요에 대처하려 하였다. 한편 河北 진출 초기에는 宗室이 주축을 이룬 軍鎭 및 行臺를 河北 일대에 배치해 이 지역에 대한 경계를 강화해 나갔다. 또한 이 지역에 대한 통제책의 일환으로 중국식의 祭祀를 거행하였고, 漢族들의 儒敎 이념을 그들의 통치 행위와 접목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하북 지배 과정은 탁발부가 河北을 지배할 수 있는 정당한 계승자로써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하나의 전제였다. 北魏의 河北 경영의 궁극적인 목표 중 하나는 郡縣支配體制의 정립이었다. 이것은 編戶制에 기초한 徵兵制의 시행을 위한 선결 조건인 동시에 三長·均田制의 시행과도 연결되어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진행된 戶籍의 정비는 지방정치체제의 완비인 동시에 個別 人身支配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北魏는 河北 진출 초기 이 일대에 설치했었던 군진을 폐지해 州郡으로 전환했으며, 이 과정에서 합리적인 기준에 근거해 지방관을 임명했다. 이와는 별도로 河北 경영에 漢人 豪强들을 적극 활용하기 위해 地方官의 本籍地 任用制를 활용하였다. 北魏는 後燕의 수도였던 中山城을 함락시킨 이후 河北 경영에 착수했지만, 문제는 두 지역간의 교통이 용이하지 않아 河北 일대에 대한 직접 통제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後燕 함락 이전, 桑乾河 상류 일대의 平城과 河北을 연결하는 간선로로는 태행산맥에 위치한 井陘이나 滏口陘을 경유하거나 上谷, 飛狐口를 경유하는 도로가 있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탁발규는 後燕의 中山城 함락 직후 平城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直道를 개통했다. 이어 황제의 순행과 對南戰을 위한 군대의 이동, 그리고 江南 정권과의 通交 과정에서 직도 개통 이후 좀 더 평이한 단거리 노선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莎泉道의 개통이 바로 그것이다. 평성의 사회경제적인 환경이 악화되면서 경사 인구의 外遷을 포함한 이동이 가속화되었다. 이것은 도로의 정비로 河北 지역에 대한 접근성이 용이해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北魏는 교통로상의 요충인 靈丘를 경유하는 靈丘道를 수축하였다. 특히 이 도로상에 위치한 영구는 太和 11년, 경사에 饑饉이 든 상황에서는 物産의 집적지로도 활용되었다. 경사와 河北을 연결하는 도로는 中山城을 기점으로 해서 陸路로 河北 평원의 남북부까지 연결되었다. 이에 반해 河北 평원 경내의 수로망은 曹魏代 이래 여러 차례 개착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西晉末, 十六國 시기를 거치면서 漕運 灌漑 시설의 상당 부분이 파괴된 상황이었다. 北魏代에는 이러한 수로망이 주로 對南戰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군대의 進軍路로 활용되었는데, 그 중심이 된 것은 鄴城 주위의 漳水였다. 장수를 중심으로 河北 평원의 남북부를 관통하는 河道가 Y자형으로 연결되었다. 洛陽 遷都 이후 南邊의 강화와 대남전의 수행으로 수로망을 정비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舊渠의 정비와 개수가 본격화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水運을 활용한 수취체제의 정비가 진행되었다. 孝文帝가 洛陽 遷都를 감행한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경사 平城의 사회경제적인 상황의 악화이고, 또 다른 하나는 孝文帝의 中原 왕조 건설에의 지향이다. 洛陽 천도 과정에서 천도에 관한 찬반 양론이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孝文帝는 漢化와 천도에 관한 한 그와 의견을 같이했던 漢人 士族들을 적극 활용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한족들이 천도 이후 北魏 조정의 중추를 담당하게 되면서 北魏 정부의 통치 집단은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新都 洛陽의 건설은 平城의 都城 模式의 기반 위에서 진행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代遷之戶를 정착시키려는 정책적인 배려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漢人 士族들의 이해관계 및 지향이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 이것은 향후 北魏 사회가 정치 중심인 洛陽과 군사 중심인 平城으로 이분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에 반해 高歡의 鄴城 천도는 군사 중심인 晉陽의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정치 중심인 鄴城과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北魏初에는 征服戰爭에 의한 掠奪과 遊牧經濟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컸기 때문에 北魏정부는 河北 일대의 漢人 豪强들을 용인하였다. 十六國 시기 이래 北魏初까지 河北 일대에 잔존했던 塢壁의 존재도 이러한 정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華北 통일 이후 약탈 경제의 쇠퇴로 河北의 농업 경제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北魏의 한인 호강 대책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이러한 시대 상황속에서 고안된 것이 바로 宗主督戶制였다. 北魏 정부는 이 제도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한인 호강 및 하북 기층 사회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恤民, 復租 조처 등도 병행하였다. 그러나 合戶 현상의 와해와 경상적인 조세 징수는 용이하지 않았다. 십육국 시기 이래 수공업 생산의 발전은 北魏代까지도 계속되었다. 당시 수공업 생산을 담당했던 계층의 대부분은 後燕 점령 이후 경사로 천사된 百工伎巧들이었다. 北魏는 이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는데 이것은 곧 피정복지 백성들에 대한 人身的인 지배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또한 北魏의 수공업 생산은 曹魏代 이래 河北 일대의 수공업 기지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수공업자에 대한 통제는 곧 河北 지역에 대한 경제적인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특히 河北과 山東 일대에서 주로 산출되는 絹은 拓跋部에게 있어 財富의 상징이었으며, 대외 교역의 대상이었다. 또한 河北을 포함한 帝國 통치를 위한 황제의 통치 자금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황제가 견의 생산과 유통망을 장악하는 일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山東을 포함한 河北 경내에서는 冶鐵 鑄造業도 발달했는데 이 과정에서 제작된 武器는 대남전을 포함한 정복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중요한 도구였다. 北魏 정부는 鮮卑族의 정착과 ‘新民’의 農耕을 위해 부수적으로 農具도 제작하였다. 金屬 珍寶類의 제작도 병행되었는데 이것은 對外貿易 과정에서 주로 활용되었고, 北族系 상층 귀족들의 수요를 충족시켜 주었다. 太武帝의 화북 통일을 전후해 약탈경제가 農業經濟로 전환되면서 河北의 농업구에 대한 조세 징수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 과정에서 北魏 정부는 민심의 이반을 막기 위해 復租 조처 등을 병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조처들은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 제한적으로 시행되었다. 이와 더불어 皇興 연간, 南征 과정에서 編戶制에 의한 徵兵制가 시행되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戶口調査가 선행되어야 했다. 북위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서 한인 호강의 대토지 소유를 제한해 蔭附戶를 編戶化함으로써 徭役 대상자를 확보했으며, 경사 일대를 강타한 기근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부심했다. 三長制와 均田制는 이러한 배경하에서 입안된 것이다. 특히 균전제의 시행은 北魏 정부의 늘어나는 絹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의도를 포함하고 있었다. 太和 11년(487), 京師 및 河北 일대에서 饑饉이 발생하자 北魏 정부는 국가가 곡물 비축분을 확보하고 수취체제를 개선하는 등의 대안을 생각하게 되었다. 종전까지의 기근 대비책은 饑民을 경제적 선진 지역인 河北 일대로 出關就食하게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河北 일대까지도 기근이 든 상황에서는 이것이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었다. 각지에서 경사로 운송되는 物産을 일단 교통의 요충에 설치된 창고에 집적해 一括的으로 운송하는 방식이 제안되었다. 또한 과거 宗主 豪强 및 地方 官府가 장악하고 있는 수취체제를 중앙 정부의 통제하에 일원화하는 방안도 추진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들은 모두 河北이 北魏의 경제적 배후지라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로써 河北 지역에 대한 北魏의 경제적 의존도는 더욱 심화될 수 밖에 없었다. 십육국 시기 이래 北方 佛敎는 異族의 中原 통치를 위해 불교와 王權이 제휴한 형태였다. 왕권은 중원 통치를 위해 불교의 민중 교화를 용인하였고, 교단은 불교의 興通을 위해 이족 정권에 협력하였다. 北魏 역시 河北 진출 이후 이 일대의 기층 사회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불교를 이용하였다. 당시 河北 일대에서 유행하던 불교는 佛道澄과 道安의 門下에 의해 전파된 것이었다. 이러한 河北 불교는 민간의 彌勒信仰이 주축을 이룬 것이었기 때문에 종종 北魏의 河北 지배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에게 이용되기도 하였다. 반면 北涼 정벌을 계기로 유입된 凉州 佛敎는 철저하게 君主 숭배를 지향하는 國家佛敎였다. 양주 불교의 유입 이후 平城은 북방 불교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太武帝는 종실 및 拓跋 귀족들에 대해 君主權을 강화하려 하였고, 崔浩를 포함한 漢人 士族들은 門閥貴族社會의 건설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이들이 수용한 것은 바로 道敎的 皇帝觀을 주창했던 寇謙之의 新天師道였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太武帝는 당시 불교의 민중 교화의 폐해를 지적하며 廢佛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당시 河北 기층사회에 대한 불교의 영향력은 의외로 강해 폐불 상황에서도 불교의 명맥은 유지되었다. 復佛 이후 불교는 철저하게 國敎化 전략을 택했다. 僧制의 제정을 포함해 교단이 국가 기구에 편입되면서 국가의 통제를 받았고, 정권 내부에서는 奉佛 세력과 연계하였다. 대신 국가는 불교의 민중 교화 영역 만큼은 용인하였다. 국가 차원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영향력이 계속 증대하자 北魏 정부는 佛圖戶와 僧祇戶制를 통해 불교 교단을 좀 더 적극적으로 대민 지배에 참여시켰다. 그 과정에서 교단은 사회경제적 재원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교단의 영향력 증대로 이어졌다. 또한 邑儀를 중심으로 불사 창건이 활발해지면서 불교는 기층 사회에 좀 더 깊숙이 침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단의 영향력 확대는 결국 또 다른 역기능을 낳았다. 불교 교단의 지나친 양적 팽창으로 불교는 결국 反國家 세력의 이념적 근거가 되었고, 각지에서 불교 반란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들의 銳鋒은 국가 뿐만 아니라 世俗社會에 준하는 계층구조를 가졌던 교단을 향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洛陽 천도를 전후해 더욱 심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北魏 불교는 중대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불교에 대한 국가 차원의 통제가 계속되는 가운데, 帝都를 중심으로 한 국가불교와 읍의를 중심으로 결합한 河北의 민중 불교로 양분된 것이다. 특히 민중들의 불교 신앙은 당시 河北 일대의 사회경제적인 상황이 악화되면서 현실에 대한 부정의 의미까지를 포함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황은 당시 帝都 佛敎와 河北의 民衆 佛敎가 접합점을 찾지 못한 데서 기인한 측면이 강하다. 平城 시대 이래 계속되어 온 皇帝崇拜 사상은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대신 현실 세계에 대한 일반 민중의 강한 애착을 근저로 했던 河北 불교와 국가불교간의 융합이 불완전하지만 이후로도 계속 시도되었다. 탁발부는 漢族들의 정권 참여를 통해 中國的 專制國家로의 이행과 胡漢 세계를 포괄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정립을 의도하였다. 그 결과 代國 시기부터 漢人 士族의 중용이 계속되었다. 이후 平齊郡의 설치까지 漢人 士族들의 중용은 계속되었지만, 그들은 북위 정부에의 出仕 과정에서 소외되었다. 또한 조정에 중용된 이후에도 그들의 정치적 입지는 불안정하였다. 특히 출신 지역에 따라 北魏 정부의 대우에도 차이가 있었다. 태화 6년을 전후해 靑齊民의 歸鄕을 허용하면서 北魏 정부는 그들의 특권 일부를 인정해 주었다. 특히 太和 改革을 계기로 그들의 정치적, 사회경제적 입지는 한층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여전히 현실 정치에 불만을 가졌고, 이것은 北魏 정부에 대한 반발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한인 사족들이 지향했던 것은 北魏 왕조체제의 유지였다. 한인 사족들은 北魏 왕조가 普遍的인 국가로 나아가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그 과정에서 점차 皇權에 종속된 官僚로써의 성향을 띠게 되었다. 반대로 孝文帝의 漢化에의 지나친 傾倒는 한화 과정에서 北族系 귀족들을 상대적으로 소외시킴으로써 탁발부 내부의 분열을 초래하였다. 그들의 河北 경영은 다소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등의 시행 착오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北魏의 중원 왕조에의 지향을 위한 첫 수순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며, 이 시기의 胡漢 일체를 위한 여러 방면에 걸친 시도들은 隋唐 帝國의 건설을 위한 전제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하겠다. 主要語 : 北魏, 河北 支配, 拓跋部, 中原王朝, 郡縣制, 京畿-河北間 道路, 洛陽 遷都, 經濟的 背後地, 國家佛敎, 河北佛敎, 漢人 士族, 漢化;本论文从"北魏为何要支配河北地区"的疑问出发, 笔者认为, 在游牧民族建立的北魏开始经营农耕民族的根据地--河北之后, 从其标榜的诸多政策中可以找到答案。通过支配河北地区, 北魏社会本身所发生的变化也可以在其中找到答案。即可以说, 这是北魏向中原王朝发展的志向。兴起于阴山山脉以北的拓跋部, 以山西高原为主要的根据地, 随着对阴山以南地区的支配的强化, 对河北平原一带也逐渐开始了关注。此地区在受到北魏的前身--代国的重视之前, 一直是其他北方民族、特别是鲜卑慕容氏等的争夺对象。这些政权为了占领冀、 定、 相州的中山、 襄國和邺城一带曾展开过激烈的角逐战。对游牧民族来说, 这一带是向南方进军的军事跳板。同时, 以这些地区的农业生产力为基础, 可以扭转其经济条件, 发挥经济后援地的作用。 当时, 本是游牧民族的拓跋部在有利于游牧的山西高原建立了根据地, 但是仅凭这样的根据地来经营国家是不够的。对代国来说, 提高山西高原的农业生产力是头等大事。所以他们将通过征伐活动俘虏的汉人迁往京师、即平城, 使其进行农业生产, 并以此为政策。但是仅仅如此是不够的, 当务之急是建立可持续供给粮食的经济后援地。根据上述政策联想起来的地方即为河北。但是太行山脉自然地理上的障碍不仅使和南朝直接通交变得困难重重, 同时也很难迫近河北平原。代国从拓跋珪以来, 征服了阴山山脉一带的诸多部族, 确保了战争所需要的兵力和兵马, 所以从某种程度上讲, 他们具备了进军河北的自信心。后来他们征服了当时河北一带的最强者--慕容垂所统治的后燕, 占领了进军河北的有利高地。此过程中, 代国取得了包括中山城在内的新的占领地, 俘获了许多"新民"。然而, 对新占领地支配体制的确立和对地域内反北魏倾向的统治成为留给他们的新课题。 北魏征伐后燕以后, 迁徙京师的"新民"在京师周围逐渐确立了农业的基础。道路的开通和修整将河北一带和京师地区连结起来, 于是此地域民心的动向变得更加容易掌握。皇帝对河北地区不断巡查, 在考察民心的同时, 也是为了在事前断绝民心的背叛。为了戒备民心的背叛, 北魏在河北地域以行台和宗室为主轴设置军镇并配置营户, 力求河北的安定。另一方面, 做为对此地域的统治政策的一个环节, 在皇帝巡查的同时进行汉族式的祭祀, 利用以汉族的忠、孝为代言的儒教理念进行统治。试图以有能力统治河北的正当的继承者的姿态建立其支配意识。特别是为了统治汉族, 强化了对地方首领的监察并实行严格的刑罚主义等。 北魏统治河北的最终目标无非是贯彻郡县支配体制。这是以编户制为基础, 以征兵制为前提条件的, 同时是确立征收体制的必须条件。天赐3年(406)正式设置地方官。但是在合并淮北前后, 开始以河北一带的一般编户为对象实行征兵制。此过程中, 户籍的整理在完备了地方统治体制的同时, 也意味着国家开始了对个别人身的支配。与此并行, 在河北一带设置州郡, 州郡成了地方行政改革的核心。基于户籍的编户制使内置的镇戍以及与州并置的军镇变得有名无实, 而且为了积极利用汉人豪强在其地域内的影响力, 实行地方官本籍地任用制。 新占领地胡汉之间的军事, 农业的分工支配体制转换为郡县支配体制, 这和只有在州郡行政体制下才可能发挥效用的三长, 均田制的实行是相关联的。从以上可以确认, 北魏政权的目标在于确保交租纳税的郡县民的存在。但是连接北魏首都平城和河北地域的交通路的未备状态, 成为他们正式进军河北的障碍, 也使他们对在山东一带兴起的叛乱很难采取适当的措施。京畿-河北间、河北境内的交通整顿就起源于这样的现实认识。这也是意图平定在平城一带频发的饥荒这一经济乱局。 随着与南朝在河北平原的南部的持续交战, 北魏认识到整顿水陆交通的必要性。北魏的经济、军事中心的南移是以河北境内发达的交通为中心展开的。山西-河北间的交通以陆路为中心, 与此相反, 连接中山-邺-洛阳的水道和东南部一带的河道、东北地域的海道等构成了Y字形, 中间地带形成了蜘蛛网的结构。这样对水陆交通的整顿确保了北魏支配河北的必需条件。 北魏经营河北的过程中, 果断实行了迁都洛阳这一在北魏史上具有重大意义的举措。这是北魏王朝体质的变化, 同时也是其志向的重大转变, 即从以山西为中心, 向以华北为中心转变;军事战略上从北方防御体制转为向南方进军体制。但是迁都洛阳意味着拓跋族从有悠久传统的政治军事合一体制向分离体制的转变, 同时也意味着北魏王朝中心的转移, 因为迁都洛阳包含着其过度的汉化意图。从而可以代替洛阳的新的根据地, 即邺都浮出水面。迁都洛阳后, 做为异民族王朝的北魏力图摆脱草原国家的性格, 向中原王朝转变, 结果没能取得成功, 不得不重新恢复鲜卑族的固有体制。 北魏对河北的经营从一开始就带有二元结构的性格。西晋末期以来河北一带持续的战乱在相当程度上破坏了此地的经济。特别是战乱过程中以坞壁为中心的自然经济的发达在间接上使河北一带的征收制度难以正常运行。隶属于坞壁主的阴附户的存在意味着国家租税收入源的减少, 妨碍个别人身支配的贯彻。所以北魏政府别出心裁地提出了宗主督户制。宗主督户制是为了合法征收租税和对河北一带的人民进行统治而提起的。但是通过这些制度实现的对河北乡村社会的间接支配本身承认宗主在地域内的影响力, 从这点来看, 这种制度绝对不会长久维持下去。 征收体制的完备是以个别户口调查为基础的。北魏政府以此为基础, 果断对三长制, 均田制等实行制度改革。在此过程中北魏对河北地域的经济依赖程度越来越高。但是这并不意味着此地域租税收入的增加。 随着河北农业经济的编入以及畜牧地的扩大和受限, 自然而然地形成了农牧业之间的界限。继而包括小农经济的出现在内, 河北的农业经济逐渐得到恢复。北魏征伐后燕以后, 通过迁入京师的手工业者, 河北一带发达的手工业生产技术在十六国时期得以传入北魏境内, 从而官家主导的手工业经济得到了发展。特别是北魏的手工业多数由汉族出身的手工业者负责, 所以政府对手工业的统治也包含了对手工业者的人身支配。而且政府在统治河北地域经济的同时, 也确保了在此地派生出的物资成为皇帝的统治资金。 给平城和河北一带带来巨大打击的饥荒以及与平城相连的漕运路无法顺畅开通, 接连给北魏政府造成了巨大的负担。而在和南朝接壤的地带设置的军镇的军粮不足对北魏来说是更大的负担。但是, 在地方官府和汉人豪强影响下的拥有漕运体系的经济结构内, 具有很强的预防饥荒和供给军需的性格特征的河北调赋难以实行其固有机能。可以说北魏中、后期以后, 征收体制的持续整顿扩大了北魏政府对河北地域的经济控制。 北魏在河北的势力, 即在河北对地域内基础势力的控制是其支配河北成败的关键。从而北魏利用宗教来加强其对河北的统治。特别是佛教为了自身的弘扬光大, 积极和王权相提携。但是道教的登场终止了佛教独霸一方的状况, 实行了中国历史上最早的废佛举措。经历了废佛过程的北魏佛教更加官方化, 竭力为提高皇室的权威而服务。这样的北魏佛教以山西地域为中心形成, 和河北既存的佛教在教义以及王朝的应对态度上, 有很大的差异。从利用佛教来招揽人心这一层次上看, 山西佛教和河北佛教的融合是衡量北魏对河北统治成功与否的关键。孝文帝迁都洛阳后, 在河北地域内也开凿了诸如龙门, 巩县等大规模石窟, 以此来宣扬佛教。从这点上可以说, 佛教的融合有着相当的进展。当然这种融合也强烈要求河北佛教做出更大的改变, 从而引发了河北地域内佛教徒的叛乱。以上皆为北魏在向中原王朝转变过程中不可避免要经历的痛苦。 以进入河北为契机, 北魏通过让汉族士人参与政权, 力图实现向汉族式的专制国家过渡并确立囊括胡汉世界的支配意识。结果从代国时期开始北魏持续实行重用汉人的政策, 这样的政策是汉族士人阶层在异民族统治下为了保住自身和努力构筑以汉族为中心的文阀社会两者相结合的产物。在北魏初期进入北魏的多数汉族还对东晋王朝充满着憧憬, 在北魏的出仕也带有消极的色彩。以清河出身的崔浩为首的汉人名门望族, 为了将以汉族为中心的文阀主义移植入北魏费尽了心机, 这在某种程度上和希望实行汉族式专制主义的北魏的立场是一致的。 北魏为了实现向中原王朝的转变, 在肯定汉人士族权势的同时, 因为担心这些汉人士族的出仕会强化其在地域内的影响力, 所以也必须对他们的加以限制。北魏前期, 政府和汉族士人层之间的矛盾以及类似于范阳出身的卢溥叛乱等局部反抗活动就起源于汉族士人对鲜卑族的种族反感。但是北魏后期, 汉族士人做为北魏朝政的一员编入北魏并参与朝政内部的权力斗争, 士人之间也开始产生分歧。可以说渤海高氏, 特别是高允、高闾等的政治处世和其在北魏内的活跃给胡汉的融合带来了巨大的发展, 即在北魏不只依赖于种族, 而是向着更普遍的国家发展的道路上, 河北高氏士族做出了巨大的贡献。 北魏通过经营河北这一过程, 在谋求灵活的帝国统治方式的同时, 经历了北魏社会自身的转化。他们为了实现从残存着部落制遗制的游牧社会向农耕社会转变, 将河北地区作为军事前沿基地, 出于确保向南方进军的跳板这一目的重视此地区的政治、经济上的效用。在胡汉双重体制多方面共存的情况下, 他们积极活用和其他北方民族不同的对河北的战略, 结果实现了其他北方民族所建立的王朝没能实现的对河北的成功占领和统治。 北魏通过经营河北所形成的向中原王朝的转换, 单纯理解为汉化的概念是不确切的。孝文帝的所谓汉化政策是否可以只单纯的理解为"汉化"还存在疑问, 从他对汉族文化的仰慕加速了北魏的灭亡这点来看, 很难将其理解成以北魏为首的北朝政权只是单纯地进行了汉化。在所谓的胡汉融合的艰难路程上, 从一方面来说是汉化, 另一方面也存在着胡化。 从这个层面来说, 北魏对河北的经营可以说取得了一半的成功。为了经营河北, 果断实行一系列的政策, 通过这些政策来贯彻汉族式的统治方式。但是在河北地域内发生的叛乱暴露了其对河北统治的局限。和初衷有所不同, 他们在进行灵活的帝国统治上所坚持的志向, 在实际经营河北的过程中没能得到彻底的应用。北魏经营河北的志向虽然没有取得完全的成功, 但是北魏社会实现了从初期的部落联盟体向中原王朝的转换, 而且地域在后来展开的北朝史上成了中心主轴。从这点上, 它的意义是绝对不容忽视的。 關鍵詞 : 北魏, 拓跋部, 河北 支配, 中原王朝, 郡縣制, 京畿-河北間 道路, 洛陽 遷都, 經濟的 背後地, 國家佛敎, 河北佛敎, 漢人 士族, 漢化.-
dc.description.tableofcontents論文槪要 = ⅶ Ⅰ. 緖論 = 1 Ⅱ. 北魏의 中原 進出과 河北 支配體制의 整備 = 9 1. 北魏의 河北 進出 過程과 慕容氏 = 9 1) 燕의 復興과 北魏의 成長 = 9 2) 拓跋氏의 河北 攻略과 慕容氏의 對應 = 14 3) 後燕의 瓦解와 北魏의 河北 進出 = 19 2. 地域 統制의 强化와 一元的 郡縣支配體制로의 整備 = 23 1) 北魏의 河北 進出과 河北-京師間 人口 再配置 = 23 2) 中原王朝 體制로의 志向 = 27 3) 軍鎭體制의 止揚과 州郡體制 = 32 4) 郡縣支配體制로의 志向과 그 限界 = 38 (1) 郡縣制의 運用과 河北의 狀況 = 38 (2) 帝國統治와 漢人 豪强과의 妥協 = 47 Ⅲ. 京畿-河北間 交通路의 確保와 河北 經營 = 51 1. 太行 橫間路의 開通과 河北의 熟地化 = 51 1) 京畿와 河北間의 落差 = 51 2) 直道와 莎泉道의 開通과 人口 遷徙 = 56 3) 京河 幹線路의 修築과 靈丘道 = 60 2. 水陸 交通網의 構築과 河北의 地域的 統合 = 65 1) 中山城 中心의 陸路 修築 = 65 2) 鄴城 中心의 修路罔 整備와 對南戰 = 69 3) 漕運의 整備와 水運 = 73 3. 洛陽 遷都와 鄴都 : 河北의 擴大 = 78 1) 平城의 首都로써의 問題點 = 78 2) 洛陽 遷都와 統治 集團의 變化 = 81 3) 洛陽 遷都 그 후-代案으로써의 鄴都 = 87 Ⅳ. 河北 經濟의 回復과 經濟的 基地 構築 = 93 1. 塢壁 經濟의 解體와 河北 地域 生産力의 回復 = 93 1) 征服戰爭과 塢壁 = 92 2) 豪强 대책과 宗主督戶制 = 95 3) 小農 經濟의 普及과 河北 經濟의 回復 = 98 2. 手工業의 掌握과 統治 資源의 確保 = 102 1) 北魏의 對手工業 政策 = 102 2) 河北 經濟의 支配와 絹 = 105 3) 對外 膨脹과 金屬 鑄造業 = 110 3. 收取體系의 整備와 河北 = 113 1) 掠奪經濟에서 農業經濟로 = 113 2) 私的 收取에서 制度化로-均田制와 三長制 = 116 3) 饑荒 對策과 河北 = 121 Ⅴ. 北魏의 佛敎 政策과 河北佛敎 = 125 1. 山西佛敎의 興起와 河北佛敎 = 125 1) 北魏 建國 前後 시기의 佛敎 = 125 2) 凉州佛敎의 山西化와 河北佛敎 = 128 2. 佛, 道間의 衝突과 國家佛敎로의 轉換 = 132 1) 廢佛 前後 時期의 政局-佛, 道의 葛藤 = 132 2) 僧官制의 制定과 佛敎 統制 = 138 3) 佛圖戶와 僧祇戶- 政敎間의 妥協 = 141 3. 佛敎叛亂과 河北 佛敎의 變容 = 144 1) 佛敎叛亂과 河北 = 144 2) 河北 佛敎의 變容 = 148 Ⅵ. 河北 世族의 收用策과 北魏 政治의 展開 = 155 1. 河北 士人의 重用과 漢人 世族의 官僚化 = 155 1) 漢人 士族과 拓跋 統治者 = 155 2) 漢人 士族의 收用策과 中原 王朝로의 志向 = 158 3) 漢人 士族의 北魏 定着과 그 限界 = 166 2. 河北 士人과 孝文帝의 漢化 政策 = 170 1) 國史之獄 以後 = 170 2) 漢化 政策과 河北 士人 = 175 3) 漢化 政策의 明暗 = 181 Ⅶ. 結論 = 185 參考文獻 = 193 中文摘要 = 205-
dc.formatapplication/pdf-
dc.format.extent3557812 bytes-
dc.languagekor-
dc.publisher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c.title북위의 하북 지배와 그 지향-
dc.typeDoctoral Thesis-
dc.title.translated北魏对河北的支配和其志向-
dc.format.pagexi ,208-
dc.identifier.thesisdegreeDoctor-
dc.identifier.major대학원 사학과-
dc.date.awarded200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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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대학원 > 사학과 > Theses_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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