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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國大典≫ 상속입법주의에 관한 연구

Title
≪經國大典≫ 상속입법주의에 관한 연구
Other Titles
A Study on the Legislative Principle of Succession Law in KYONGKUKTAIJUN(經國大典) : with focus on testate succession and legal succession -
Authors
김민정
Issue Date
2005
Department/Major
대학원 법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There is a vague belief that freedom of will is the product of western society. However, it is normal at the moment of death for people to state their wishes as to the inheritance and moreover, even our ancestors made use of wills in succession to property. This leads us to ask then, how did the KYONGKUKTAIJUN, which was a fundamental code in the Chosun Dynasty, provide freedom of will? This is the first subject of this thesis. It also meant to serve as a judgmental examination from a legal point of view using previous studies conducted by sociologists and historians. The second subject of this thesis is to study how freedom of will was achieved from the late Koryo to the early Chosun period (A. D. 12~15C) through examining historical materials and to also find the original nature of inheritance law before being distorted b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Freedom of will then is concerned with how people recognize their property. Because our ancestors didn't regard personal property as the family's property, the government guaranteed freedom of will from the Koryo Dynasty. The principle of the freedom of will has not been changed since it was founded during the Chosun Dynasty and it was stated that the principle was a general principle by providing for the first code in the succession law of KYONGKUKTAIJUN. Of course, Japanese succession law guaranteed freedom of will but there are unique aspects in the succession system of the Chosun Dynasty. Specifically, it was that daughters and sons had equal shares and also that the major object of succession were slaves. This then, they reflected in KYONGKUKTAIJUN. In addition, the legal succession system of KYONGKUKTAIJUN prescribed very complicated heirs, shares and succession order very elaborately in a manner that reflected the grounds of the succession in that period. The mistress's children(妾子女), adoptive children(養子女) and spouse's position each reflected the principles of blood ties, support and secure livelihood. The male family member who presided over ancestor worship had a special right to the house where the family shrine(家廟) was located. In addition, he had an additional right of share. This reflects the ideological character of KYONGKUKTAIJUN, i.e. the administrators' ideal to lead in Confucian society. However, legal succession was a default system applicable only if there was a no testate succession, so a testator could change the legal succession by will. It was permitted firstly, that a testator deprive the heir's apparent right by will with the name of unfaithfulness to their parents(不孝). Secondly, a testator could change the succession rank or give people who were not heirs by law by a general legacy and a specific legacy. In addition, a testator also could divide the share freely. In other words, a testator could give more property to some children or set up the worship property. Nonetheless, testators often divided their property evenly between their children for the sake of family harmony in many cases. It was not rare for the heir apparent to be badly off because freedom of will was guaranteed legally and it is customary for the testator to make his or her will alike. For this reason, provisions protecting the heir apparent began to appear at the end of the Koryo Dynasty and it became more specific in KYONGKUKTAIJUN. Another aspect found was that it prescribed that donations to Buddhist temples be prohibited. Further, if people gave or testate their property to someone who was not a certain relative, the will only had effect when it had undergone a formal approval procedure(立案). In particular, there is an article that guaranteed the legal effect of the ancestor's order in KYONGKUKTAIJUN. So, for example, if there existed an ancestor's order in a will that stated, "Don't give my inheritance to people who are not my descendants(勿給孫外)", the inheritance had to be left to the heirs. If a testator gave or left it to other people, the heir had a right to dispute the will. In other words, the function of the order was similar to reserve in modern succession law. In spite of the succession system of KYONGKUKTAIJUN, it not only guaranteed freedom of will but also contained articles to protect heirs like these it may have otherwise disregarded. A most critical reason is that Korean legal history was interrupted by Japan. The reports that were made b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said that there was no obvious custom in the Chosun Dynasty that deprivation of an heir's right was permitted and it was the same to reserve. However, after independence this kind of distortion had influence upon Korean law. Although the reserve was legislated by the revise of civil law in 1977, there is no article to deprive an heir's apparent right by will in the existing law. Though people who make a will for succession are not common in Korea, the law needs to revise and expand freedom of will when we take into account that Korea has accelerated to become an aging society and that succession has become a kind of reward. However, the more important thing is how to use freedom of will. Although the will itself is not familiar with us because it is made on the supposition that we'll die, we need to exercise the freedom of the will actively if we take into account that it is effective to prevent a succession dispute.;인간이 자신의 사후를 대비해서 혹은 그 임종에 임박하여 일정한 遺意를 남기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근대 국가의 상속법제는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언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 이는 우리 민법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이처럼 근대적 민법을 계수하기 이전부터 사람들은 유언의 자유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우리 선조들 역시 유언을 통해서 재산을 처분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후기까지 우리 법제의 기초가 되었던 ≪經國大典≫에서는 유언의 자유를 어떻게 규율하고 있었을까? 이처럼 본 연구의 목적은 ≪經國大典≫ 상속법제의 입법주의를 분명히 밝히고, 당시에 유언 자유의 모습을 史料를 통해 구체적으로 구성함으로써 전통 상속법제의 고유한 성격을 발견하는 것이다. 고려 및 조선은 일찍부터 중국의 법제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지만, 중국과 달리 家族共産의 관습이 없었고 가족 구성원의 재산을 어디까지나 개인의 私財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중국법상의 家産分割制度를 그대로 수용할 수 없도록 하였으며, 상속법에서 입법주의의 변용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이에 고려말부터 財主가 작성한 상속문기에 우선적 효력을 인정하는 입법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유언 자유주의의 원칙은 ≪經國大典≫ <刑典> [私賤條]에 ‘未分奴婢 勿論諸子女存沒分給’이 첫번째 조문으로 규정됨으로써 상속법의 일반원칙이 되었다. 물론 일본의 상속법제도 일찍부터 財主의 유언에 우선적 효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조선초기의 상속제도에는 또 다른 특성이 있었는데, 무엇보다 딸이 아들과 마찬가지로 상속인이 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상속분도 동등하게 보장받았다는 점이다. 또한 노비가 주된 상속재산이었다는 점도 조선초기 상속제도의 또 하나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經國大典≫의 상속법제는 상속인, 상속분, 상속순위를 세세하고 복잡하게 규율하고 있는 법정상속제도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상속의 근거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妾子女와 養子女의 상속권과 배우자의 상속권은 각각 당시에 상속의 근거가 혈연주의, 봉양주의, 생활보장에 기초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經國大典≫에는 개국 초의 상속법제와는 달리 奉祀條를 규정하여 承重者에게는 立廟家舍에 대한 독점상속권과 법정상속분의 加給을 보장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유교 중심의 사회를 이끌어가고자 했던 당시 집정자들의 의지, 즉, ≪經國大典≫의 이념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법정상속은 어디까지나 財主의 유언이 없는 경우에 이루어지는 보충적인 것이었으며, 財主는 유언으로 법정상속을 변경할 수 있었다. 우선, 유언으로 廢除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財主는 불효 등을 이유로 추정상속인의 상속권을 박탈할 수 있었으며, 포괄적 유증을 하거나 특정적 유증을 통해서 후순위 상속인이나 상속인이 될 수 없는 자에게 상속재산을 分給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財主는 상속분을 자유롭게 지정하였다. 즉, 특정 자녀에게 상속재산을 加給하여 상속분을 변경하기도 했으며, 奉祀條를 임의로 설정하기도 했다. 또한 많은 경우에 財主는 균분상속을 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자녀들이 화목하게 살기 바라는 마음을 유언의 자유를 통해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유언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었고 財主가 상속문기를 작성하여 유언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상속기대권자들이 생계를 위협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려말부터 상속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입법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입법은 ≪經國大典≫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되기에 이른다. 우선, 증여나 유증을 제한하여 절에 시주하거나 무당에게 재산을 시납하는 것을 금지하고, 일정한 친족이 아닌 자에게 재산을 처분할 때는 官의 立案을 받을 것을 규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經國大典≫은 遺書의 법적 효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勿給孫外’라는 遺書가 있는 경우에 祖業재산은 반드시 상속인에게 남겨져야 했으며, 財主가 임의로 祖業재산 처분했을 경우에 상속인들은 遺書로 祖業재산의 반환을 청구할 수 있었다. 즉, 당시에 遺書는 오늘날의 유류분과 유사한 기능을 했다. 이처럼 ≪經國大典≫의 상속법제는 유언 자유주의를 상속법의 일반원칙으로 채택하여 유언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상속인들을 보호하는 입법을 규정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측면은 제대로 고찰되지 못하였는데, 그 원인은 무엇보다 일제의 지배라는 우리 법사의 단절에 있다. 특히 일제의 ≪관습조사보고서≫는 조선에는 유언으로 추정상속인을 廢除하는 명시적인 관습이 없다고 했으며, 이것은 유류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일제에 의한 전통 상속법의 이같은 왜곡은 해방 이후 우리 법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유류분이 1977년 민법 개정으로 신설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현행 민법상 유언으로 추정상속인을 廢除할 수는 없다. 물론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상속재산을 처분하는데 유언의 활용도가 그다지 높지는 않다. 그러나 고령화 사회가 가속화되고 상속도 점차 대가적 성격으로 바뀌어 갈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입법도 유언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유언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유언은 자신의 죽음을 상정하고 하는 것이기에 우리에게 친숙할 수만은 없지만, 상속분쟁을 사전에 방지하는 유언의 기능을 고려해서라도 유언의 자유를 좀 더 적극적으로 행사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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