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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평양지방의 혼례 복식에 관한 연구

Title
1940년대 평양지방의 혼례 복식에 관한 연구
Other Titles
A Study on the Wedding and Dress during 1940s in the region of Pyong-Yang
Authors
임선희
Issue Date
2005
Department/Major
대학원 의류직물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dvisors
홍나영
Abstract
본 논문은 1940년대 평양(平壤)의 복식문화(服飾文化)와 혼례복식(婚禮服飾)에 관하여 고찰한 것이다. 평양지방의 복식과 혼례복에 대한 문헌과 복식자료가 부족한 관계로 이 연구는 평양과 평양에 인접한 평안남도 지역 출신 70대~80대 사이의 노인들과의 면접조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논문의 내용은 첫째, 1940년대 평양에서 착용한 의복(衣服), 의복에 사용한 의료(衣料), 기타 수식류(修飾類)에 대한 조사이고 둘째, 당시 평양에서 치른 전통 혼례와 신식 혼례의 절차 및 착용한 혼례복(婚禮服)에 대해 조사한 것이다. 1940년대 평양 복식문화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었다. 평양에서는 조선시대부터 목화(木花)와 양잠(養蠶)이 성행하여, 무명[木棉]과 명주(明紬)가 가장 널리 사용된 의료(衣料)였다. 겨울 추위가 혹독한 이 지방에서는 명주에 솜을 넣은 솜바지 · 솜저고리는 가장 기본적인 방한복(防寒服)이었다. 여자는 속옷으로 속속곳과 단속곳을 착용하였는데, 이 두 가지에 대해 정확한 구분 없이 모두 ‘고의’라 부르고 있었다. 허리띠는 두 가지 개념의 것이 존재하였다. 하나는 치마가 흘러내리지 못하도록 매는 것으로 ‘각띠[각대]’라 불렀으며, 혼례시(婚禮時)에는 여기에 화려한 노리개들을 매달아 늘어뜨렸다. 다른 하나는 허리띠는 저고리와 치마 사이를 가리기 위해 착용한 일종의 가슴 가리개였다. 이는 보온의 역할도 겸하였으며 중년층과 노년층에서 착용하였다. 이 지방 저고리의 특징은 양쪽 소매의 앞면에 가로의 재봉선이 있는 것이다. 이 재봉선 아래는 여분의 옷감을 시접의 형태로 숨겨놓았다. 이는 오래 입어 배래선이 닳게 되면, 세탁할 때 바느질 선을 뜯어서 늘린 후 닳은 부분을 베어내고 새 배래선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치마를 여미는 방법은 지방색(地方色)을 지닌 것으로, 서울의 경우 왼쪽으로 여며 입으나 평양의 경우는 그 반대인 오른쪽으로 여며 입었으며, 이는 경상도지역과 동일하다. 털배자는 방한(防寒)을 위해 모든 여성들이 애용하였고, 평양에서는 ‘등거리’라 불렀다. 갖저고리는 매서운 추위에 견디기 위해 안에 모피(毛皮)를 댄 조금 긴 저고리로, 착용대상은 주로 노년층 여성이었다. 등거리와 갖저고리에 사용되는 안감의 모피(毛皮)는 양털가죽, 토끼털가죽 등이며, 고급품은 가장자리 선(선)에 수달(水獺)이나 호랑이의 털가죽을 사용하였다. 한림저고리는 중년 여성이 착용하는 것으로, 갖저고리보다 길이를 짧게 하여 안감에 털을 받치되 가장자리의 선(선)은 두르지 않은 것이다. 남자의 바지는 대부분 무명과 명주로 만들었으나, 모직물이 수입되자 세루로 바지를 만들어 입었다. 집안에서 남자의 차림새는 바지?저고리 위에 조끼를 착용하였고, 외출시에는 대부분 이 위에 두루마기를 입었다. 마고자는 집안에서 일종의 멋으로 입는 경우가 있었고, 외출시에는 반드시 두루마기를 갖추어 입어야만 했다. 마고자를 외출시와 집안 모두에서 일상적으로 착용한 것은 오히려 여자들이었다. 1940년대 평양의 여자 머리모양으로는 중년과 노년층에서 모두 낭자머리, 즉 쪽진 머리를 하였다. 그러나 1940년 이전에는 노년층은 머릿봉, 중년층에서는 둘레 머리, 테두 머리라는 명칭의 얹은 머리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평양여성의 대표적 쓰개류인 머리수건은 명주로 안팎을 제작하여 솜을 넣어 방한(防寒)과 외출시 정장(正裝)을 겸한 목적으로 사용했다. 이 밖에 조바위와 남바위도 평양에서 쓰개류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평양의 혼례(婚禮)와 복식(服飾)에 대해 살펴보면, 1940년대 평양에서의 혼례에 앞선 준비절차는 약혼(約婚)과 예장(禮裝)보내기로 구분되었다. 예장은 현재의 예단(禮緞)을 뜻하는 평양식 표현으로,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신부 옷감과 이부자리감, 패물 등을 예장으로 보내면 신부집에서는 감을 사용하여 옷과 이부자리 등을 만들고 받은 만큼 더 보태는 것으로 나타났다. 혼례(婚禮)는 전통 혼례와 신식 혼례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었다. 1940년을 전·후한 시기의 평양 전통 혼례식에는 서울과 달리 전안례(奠雁禮)·교배례(交拜禮)·합근례(合?禮)의 예식절차가 모두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평양의 지역적 특성상 이미 혼례의 예식 절차가 약소화 된 것을 나타낸다. 예식 후에 차려주는 큰 상은 평양 혼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정인 것으로 보인다. 평양에서도 전통 혼례시 신랑은 사모관대(紗帽冠帶), 신부는 원삼(圓衫)·칠보단장(七寶丹粧)을 착장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혼례 절차의 간소화가 예복(禮服)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자, 1940년대 신부의 차림새는 점차 녹의홍상(綠衣紅裳)과 칠보단장으로 바뀌었고, 신랑은 세루두루마기 차림으로 바뀌었다. 평양 신부의 성장(盛裝)인 칠보단장(七寶丹粧)은 꽃이나 보석류로 가득 장식한 족두리와 칠보장식을 한 큰 비녀, 수를 놓은 앞댕기와 뒷댕기로 머리를 꾸미는 것이다. 평양에서는 폐백을 사돈뵈기라고 하였는데, 이때 신부는 원삼을 벗은 녹의홍상에 칠보단장을 한 차림이었다. 추운 날씨일 경우에는 등거리를 덧입었으며, 신부의 배자는 남색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와 같이 신부가 폐백시 착용하던 복식(服飾)은 결국 간소화된 전통식 혼례복으로 자리매김한 것을 알 수 있다. 1940년대에는 신식 혼례의 경우에도 전통 혼례문화가 동시에 나타났다. 즉 신식과 전통식 혼례가 절충적으로 이루어졌다. 신식 혼례의 장소는 교회, 회관, 강당 등으로 신부는 하얀색의 치마·저고리에 면사포, 신랑은 연미복(燕尾服) 또는 양복을 착용하였다. 신식예식을 마친 후 신랑집에 도착하면, 신부는 녹의홍상(綠衣紅裳)을 입고 칠보단장으로 성장(盛裝)을 하였으며 신랑은 두루마기를 착용한 후 큰 상을 받고, 폐백을 드린 것으로 나타났다. 즉 신식 예식을 치르고 나서 전통식의 큰상과 폐백을 드리는 간소화된 절차에 따라 간소화된 예복이 정착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상의 면접조사를 통하여 평양에서는 추운 기후로 인하여 등거리[褙子], 갖저고리, 한림저고리, 머리수건 등의 독특한 복식문화가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1940년대에는 이미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 신식 혼례가 많이 행해졌고, 신식 혼례 후에는 후의례(後儀禮)로써 전통 혼례를 간소하게 치렀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절차가 오늘날의 폐백문화로 정착된 것으로 생각한다. 본 논문은 평양 지역의 특징적인 복식(服飾)의 형태와 착용 시기 및 대상을 정리하는 데 의의를 두었다. 분단 상황이라는 전제에서 보면 실향민이 생존해있는 동안에만이 분야의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빠른 시일 내에 평양 이외에 다른 지방의 북한 복식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남북 학계간(學界間) 교류가 가능한 날이 온다면 현지 조사에 의해 개화기 이후는 물론 1950년 이후 평양복식의 변천에 관한 연구도 요청된다.;This dissertation has examined the dress culture and wedding ceremony during 1940s in the region of Pyong-Yang(平壤). This research is composed of literatures and limited historical data and also information acquired from interviews with small number of people who resided in city of Pyong-Yang and Pyong-An Namdo(平安南道) during the specified period. This dissertation has two main themes. First research is about the clothing and their components, accessories worn during these times at Pyong-Yang. Second theme is about the processes and the wedding attires of traditional and modern marriage ceremonies. The special characteristics of dress culture in Pyong-Yang before and after 1940s could be summarized this way. Pyong-Yang had ample supply of cotton and silk since Joseon Dynasty(朝鮮時代); therefore Moo-Myong(木棉, cotton clothing) and Myung-Joo(明紬, silk clothing) were most widely worn. This region, known for its cold winter weather, used cotton filled silk pants and Sohm-Jeogori (Korean styled jacket) as the most basic winter clothes to fight off the cold. This region also has two types of women's belts. One was to hold the skirts in its place which was called Gak-Dae(or Gak-Thi) in Pyong-Yang and for the wedding an extravagant accessories were dangling from this belt. Another type of women's belt was a sort of cover for the space between top blouse and skirts. This belt also functioned to keep warm and middle aged to senior aged group used it. The special trait of Jeogori of this region is that there is a seam that crosses both sides of the frontal sleeves. Right below this seam is a margin that holds a hidden extra supply of cloth. After the sewn line is worn out after long time usage, a seam could be torn out and then cut out the wornout part and sew the hidden extra cloth back to as a new sleeve. A way to hold up the Chima(Korean styled skirt) was to signify the regional characteristics; Chima was to be held to the left side in Seoul but a Chima was held to the opposite side to the right in Pyong-Yang and Kyungsang-Do was also the same. Women's fur-lined vest was worn to block off the cold and it was also called “Deung-Guri” and all women wore this vest. Got-Jeogori was a leather lined Jeogori which was longer than regular Jeogori that was used to block off the cold weather and elderly women have frequently worn them. Deung-Guri and Got-Jeogori used the leather inseam which as sheep skin and the outside edges were otter and tiger skin which showed its premier quality. Hanlim Jeogori was mostly used by middle aged women; it was shorter than the Got-Jeogori and was lined with fur inseam but the edges were not covered with leather. Men's attire in home was with vest over Jeogori (Korean styled jacket and pants) and men wore Durumagi (Korean styled formal topcoat) in their outing. Magoja wasn't worn in their outgoing. Therefore, it was rather women who wore Magoja most of the time. Hairstyles of women during 1940s Pyong-Yang were mostly Nangja style or a stylized bun among middle aged to elderly. But before 1940s, elderly has “Muhritbong” middle aged has so called “Doolrae-Muhri”, “Taedoo-Muhri” which was a name for the wig buns. The Muhrisoogun, which was the most representative of the Pyong-Yang women's headwear, was made with silk inside and out with cotton to protect from the cold weather as well as functioning as a ceremonial dress. Furthermore, Jobawi and Nambawi was also used as headwear in Pyong-Yang. Next research was done on the marriage ceremony and wedding attires. The preparation processes prior to marriage in Pyong-Yang in 1940s were divided into Yakhon(約婚, engagement) and Yehjang (禮裝, ceremonial dress). Yehjang was an expression in Pyong-Yang which is like modern Yehdan in which a groom sends cloth and bedclothes, accessories to the bride's home. A bride's family uses those materials to make clothes and bedding and also adds equal amount of cloth for the newlyweds. Honrye (marriage ceremony) could be divided into traditional and modern marriage ceremony. In the Pyong-Yang traditional marriage ceremonies around 1940 does not exhibit Jeonahnrae(奠雁禮), Gyobaerae(交拜禮), Hopgeunrae(合?禮) unlike Seoul. This indicates that the process of wedding ceremony has already been reducing due to regional differences. But the great feast after the ceremony seems to be the most important element of the Pyong-Yang marriage ceremony. In Pyong-Yang, groom wore samogwandae(紗帽冠帶) and bride wore Wonsam(圓衫) chilbodanjang(七寶丹粧) in traditional marriage ceremony. But when the shortened trend of the marriage ceremony was also reflected in the ceremonial dress, the attire of the bride in 1940s changed into Nokeuihongsang(綠衣紅裳) and Chilbodanjang(七寶丹粧) and groom wore Durumagi. The gala dress of the bride was the Chilbodanjang which was to decorate the hair with Jokduri(簇頭里), which was adorned with flowers and jewelry, and big Binyuh(簪) with Chilbo(七寶) decoration and also Apdangi and Duitdangi. In Pyong-Yang, they called Paebaek(幣帛) as seeing the in-laws and the bride is wearing Nokeuihongsang with Chilbodanjang but without the Wonsam. In case of cold weather, Deungguri(褙子, Baeja) was worn, normally blue in color. Likewise, dress for the bride during Paebaek has been changed into settled into simpler traditional wedding dress. In 1940s, even for new modern wedding ceremony, the traditional wedding culture also appeared simultaneously. In other words, modern and traditional elements were blended together in wedding. The places of new modern wedding ceremonies were church, assembly hall and auditorium and brides wore white Chima Jeogori and veils and grooms wore tuxedo or a suit. After the modern wedding ceremony, both arrive at a groom's home and a bride wears the Nokeuihongsang with Chilbodanjang in gala dress and groom wore Durumagi. Afterwards, they received the great feast on the table and give Paebaek in a simplified process which the traditional ceremonial dress also followed suit in the same manner. From the interviews conducted as listed above, independent dress culture seemed to appear due to cold weather in Pyong-Yang. Then the eager acceptance of occidental cultures resulted in new modern wedding ceremonies and as a post wedding ceremonial process, the traditional wedding has been simplified both in process and dress. This process has evolved and settled into the present Paebaek culture of this generation. This dissertation focused on the regional characteristics of Pyong-Yang in dress form, timing and wearer. Under the current division as presupposition, this area of study is only possible as long as the actual residents are still alive. Therefore, a wide spectrum of studies should be conducted for regions of North Korea other than Pyong-Yang without delay. If North and South Korea faces a day when the scholastic interaction is possible, continuous studies of Pyong-Yang dress patterns and its changes, not only after enlightenment periods but also after 1950s, would be recommen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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