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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문제와 광주민중항쟁

Title
악의 문제와 광주민중항쟁
Other Titles
The Problem of Evil and The Kwang-ju Democratic Uprising : A Theological Study on the Problem of Evil Brought out in ‘Kwang-ju’ Novels
Authors
이지현
Issue Date
2005
Department/Major
대학원 기독교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칸트가 말했듯, 세상이 악하다는 탄식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역사의 어느 페이지를 보더라도 학살과 폭력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현재 지금 이 시각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과 테러로 인해 무고한 생명들이 죽어간다. 특별히 지난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 전쟁을 통해 목격된 악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부터 다시 묻게 했다. 그것은 인간을 당당한 주체로 세움으로써 세상의 주인으로 만들었던 근대 과학정신에 대한 회의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인간 정신사를 지배해온 종교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본 논문은 어거스틴과 칸트가 말했던 ‘원죄’와 ‘근본악’의 개념을 살피면서 악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원죄’와 ‘근본악’은 악이 마치 인간의 본성과도 같아서 근절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정도로 뿌리 깊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편, 우리는 리쾨르의 해석을 통해, 윤리적인 접근으로 풀 수 없는 ‘이미 있는 악’과 만난다. ‘이미 있는 악’은 악의 실체를 인간 바깥에 두어 비극으로 빠지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던 어거스틴과 칸트의 관점과는 대립되는 것이다. 리쾨르는 그들의 윤리적인 세계관을 높이 평가하고 지지하는 입장에 서면서도, 이러한 “악의 어두침침한 체험”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미 있는 악’은 악이 곧 인간의 존재구조라는 사실을 열어 밝힌다. 그것은 인간이 구조악 속에 살면서 세상의 죄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러한 인식은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어도 그 일에 대한 나의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생각으로 이끌고, 나의 잘못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유한 책임이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해 내가 책임이 있다는 무한 책임으로 나아가게 한다. 윤리만으로 풀 수 없는 악의 문제는 고통을 생각하게 한다. 고통은 흔히 신(神)의 섭리라는 이름 하에, 혹은 궁극적인 선(善)을 이루게 되는 초자연적 질서의 한 과정으로서 정당화되었다. 하지만 고통 받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할 때, 고통을 정당화 하는 것은 비도덕적인 일이다. 고통은 파괴적이어서 절대 악이다. 그것은 있지 않아도 되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이유에서라도 그것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본 논문은 레비나스를 따라서 고통은 무익한(useless)것이라는 데에 우선적으로 동의한다. 고통은 죄에 대한 벌도 아니고, 연단을 위해 하느님이 허락하신 시련도 아니다. 그것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대속(substitution)’하기까지 하는 윤리적 주체를 말하면서, 타자의 고통을 덜어 줄 유일한 사람으로서 ‘나’를 지목한다. 타자의 고통은 ‘나’의 고통으로 전환되며, 타자의 고통은 바로 ‘나’의 책임이 된다. 바로 여기서 고통은 그 본질적인 부정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서양문헌에서 ‘아우슈비츠’는 악이 마치 실체인 것처럼 폭발하여 현실에 터져 나왔던 비극적 사건으로 기억되면서, 그 어떤 설명으로도 이해가 불가능한 악의 전형을 나타내는 보통명사와 같이 쓰인다. 본 논문은 이 땅의 ‘아우슈비츠’로서 ‘광주’를 말하려 했다. 그 방법으로서 5.18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소설들을 텍스트로 삼았고, 특별히 ‘광주’를 통해 인간 본질의 문제를 드러내려 했던 정찬의 소설을 주요 텍스트로 하여 ‘광주’에서 드러난 악의 문제에 대해 알아보았다. 정찬은 인간 사회의 문제를 ‘죄’의 문제로 보면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 슬픔을 드러내려 했다. 그에게 ‘광주’는 끔찍한 학살이 있었던 비극의 현장일 뿐만 아니라, ‘죄짓지 않을 가능성이 없는’ 인간의 본질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한다. 정찬은 피 흘림의 역사를 이어가는 인간 존재에 대해 깊이 슬퍼해야 한다고 말한다. 존재에 대한 깊은 슬픔은 깊은 죄의식을 낳는다. 깊은 죄의식은 세상의 고통에 대해 민감하게 하며,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내가 그 고통에 어떤 영향을 주지는 않았는지 반성하도록 한다. 그것은 “길고 깊은 인과관계”를 깨닫는 것이다. 욥은 자신이 겪은 부당한 고통에 대해 하느님에게 따져 물었다가 곧 입을 닫고 회개하기에 이른다. 하느님은 그가 겪은 고통에 대한 어떠한 대답도 해주시지 않았지만, 욥은 고통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다. 아마도 그때 욥은 자신이 당한 불행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게 되었고, 그러한 고통을 낳은 세상의 죄를 발견하면서, 세상의 죄에 동참하고 있었던 자신의 죄를 깊이 인식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구조악 속에 살면서 그 구조의 혜택을 받고 그것을 지속시키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길고 깊은 인과관계”를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고통에 대해 응답할 책임이 바로 ‘나’에게 있음을 말한다. 일반 윤리 너머에 있는 무한책임의 인식으로 나아가게 한다.;That the world lie in evil is a plaint as old as history, as Kant said. Massacres and violence certainly appear in any page of history, and lots of innocent people are being killed in wars and terrors, great and small, in all parts of the world. Especially in the last 20th, the evil shown in two world wars arose a intrinsic question of human being. It brought not only doubt about science which made an individual as a reasonable subject but crisis of religion which had dominated mental history of human being. This thesis begins a discussion looking into ‘original sin’ and ‘radical evil’ that Augustine and Kant elaborated on respectively. Those notions tell us that evil is so deep-rooted enough that it's almost like nature and irradicable. On the other hand, through the interpretation of Ricoeur, we perceive ‘evil already there’ irreducible to the ethical. ‘Evil already there’ is tragic vision of evil opposite to ethical one of Augustine and Kant who thoroughly refused to think of evil as the exterior substance of human being. Though Ricoeur thinks no end of and upholds their ethical aspect of evil, he asserts that this “the darksome experience of evil” shouldn't be lost. ‘Evil already there’ discloses the fact that evil is the structure of human being's existence. It reveals that Human beings live in structure evil and cannot but participate in sins of the world, so we all are sinners. And yet, this thought doesn't proceed to whole tragedy. It leads us to think that we aren't freed from our responsibility even if there's no direct casuality. Moreover, it shows us the way to the infinite responsibility saying that ‘I’ am responsible for everything and for all, beyond the finite responsibility related to my own fault. The problem of evil that cannot be solved only with ethics makes us think suffering. Suffering has been usually justified in Divine Province or as a progress of supernatural cosmos integrated into the ultimate Good. Considering the situations of sufferers, however, to justify suffering is immoral. Suffering is devastating, so it is absolute evil. Because its absence is even better, we can never say that suffering is necessary for any reason or other. According to Levinas, this thesis initially consents that suffering is useless. Suffering doesn't mean probation God allowed as well as penalty of the sufferer's transgression. Suffering is absurd, for nothing. By the way, Levinas even says the ethical subject to substitute for the other and designates ‘me’ as an unique person who's able to relieve suffering of the other. My suffering converts into a suffering for the other's suffering, and ‘inter-human’ perspective of my responsibility for the other's suffering arises. Right at this moment, suffering has a new meaning in the ‘inter-human’ world that preserves its inherent negativity. In western writings, ‘Auschwitz’ is recollected as the tragic event burst into in the world as if evil is substance. It is also mentioned as a common noun reflecting a model of inscrutable evil. This thesis aims to state ‘Kwang-ju’ as ‘Auschwitz’ of Korea. As the method, the problem of evil is discussed with novels referring to Kwang-ju Democratic Uprising, especially written by Jung Chan who tries to reveal human substantial problems in ‘Kwang-ju’. Saying that all troubles of modern society have been caused by human ‘sin’, he shows the fundamental sorrow of human being. For him, ‘Kwang-ju’ is not only the spot where the horrible slaughter took place but the symbolic space where human character ‘impossible not to commit a sin’ appeared plainly. The writer remarks that we should lament for human being succeeding to bloody history. The deep sadness of being gives rise to deep feelings of guilt. With deep guilty conscience, we become sensitive to others' suffering in the world considering that we may have influence on the suffering though there's no direct casuality. This means being aware of the “long and deep casuality”. Job resisted against God with his unjustifiable suffering, but he shut his mouth up and repented in dust and ashes after all. As we know, God didn't give him any proper answer at all, but Job proceed to another dimension leaving the matter of his suffering unsettled. At that time, he may have seen others' suffering through his suffering and his own sin joining in the sin of the world which gave birth to the suffering. We live in structure evil, benefit from the structure, and keep it up. It's important to know this “long and deep casuality”. It announces that it's ‘I’ who have responsibility for responding to all suffering. It conducts us into the recognition of the infinite responsibility beyond general eth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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