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 21 Download: 0

朝鮮時代 陶瓷祭器 硏究

Title
朝鮮時代 陶瓷祭器 硏究
Other Titles
A Study on ceramic ritual vessels of Joseon Period
Authors
安星稀
Issue Date
2005
Department/Major
대학원 미술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This paper aims to examine what kind of characteristics ceramic ritual vessels(陶瓷祭器), one of the most representative ritual vessels of the Joseon period, has and how the production of ceramic ritual vessels processed out in different regions and periods. First of all ceramic vessels had an important position in rituals in the Joseon period. Specifically ceramic vessels were used for the five Confucius rites which had been practiced on purposeof reinforcing the royal authority and legitimacy since the founding of the country. In the previous period ritual vessels were usually made of metal. However the lack of metallic materials since the late Goryeo dynasty caused the prevalence of the ceramic ritual vessels in the Joseon dynasty. Also the appearance and popularity of white porcelain made a big influence in the production of ceramic ritual vessels. The rise of ceramic ritual vessels for the national rites may also have had an important role in the establishment of official kiln(官窯), which produced tableware(器皿) in the late 1460s. There are two types of ceramic ritual vessels that were produced in the Joseon period; One that meets the requirements of an illustration of ritual vessels(祭器圖說) and the other that has a mixed characteristic of the vessels for ritual and everyday usage. When searched according to an illustration of ritual vessels(祭器圖說) in The law for five rites(Orewi, 五禮儀) and Formality & Protocol Manuals(Euigwae. 儀軌) published since the 15th century, it was found that the ceramic vessels that were usually produced were Bo(보), Gwe(궤), Jak(爵), I(彛), (尊)[Huijun(犧尊), Sangjun(象尊), Chakjun(著尊), Sannoe(산뢰), Sanjun(山尊), Jun(尊)], A cup(盞), An incense burner(香爐), (이). Also the ritual vessels imitating illustration(圖說) and metallic vessels help one better understand the production of the ritual vessels of the King Sejong period, and, as found in the shrine site of the South Sea(南海神祠), were used in the national the Medium Sacrifices(中祀) and the Small Sacrifices(小祀) and the royal worldly sacrificial rites(俗祭). Among the ritual vessels that developed from the vessels for everyday usage are bowl(鉢), dish(皿), and bottle(甁), which usually have letters like Je(祭) or were attached with high and square base identifying as a ritual vessel. Since the spread of the Jooja's principles for home rite(朱子家禮) that instructed the gentry to use everyday vessels for rites, it became common to use everyday vessels for the purpose of performing rites. Given the fact that such ritual vessels were used in the royal worldly sacrificial rites(속제), it can be also assumed that the popular way among the gentry may have been applied to the royal Ye(禮) at that time. Also the production of ritual vessels showed varying patterns in different periods and regions, which enabled a chronology of the vessel production. Comparing what have been excavated in the kiln site(窯址), based on what have been mentioned above, I have divided the chronologyof the ritual vessels into 3 periods. In the first period ranging from the early 15thcentury to the late 16thcentury, most of the ritual vessels were the imitations of the metallic vessels with the variations of everyday vessels in very few cases. Until the mid 15th century, when there was no official kiln(官窯) yet all over Gwang Ju, Kyonggido, the ceramic ritual vessels were produced as tributes in each region. At that time most of the ritual vessels were made of the skill with inlay(象嵌) and incised(線刻) buncheong ware(粉靑沙器) and the white porcelain(白瓷) were not very common. One good example of the ritual vessels produced in such way is found in Choonghyo-dong kiln site(忠孝洞窯址)from Gwang Ju, Chollado. On the other hand, in Gwang Ju, Kyonggido, it was not yet common to see the ritual vessels, which imitated the metallic vessels. Between the late 15th century and the 16th century rose the production of buncheong ware with underglaze iron-painting(鐵畵粉靑沙器) and buncheong ware with brushed ornament(귀얄粉靑沙器), and the ritual vessels made out of the white porcelain(白瓷) and showing both simplification and formalization. Such change could have originated from that, since the establishment of official kiln(관요), buncheong vessels(粉靑沙器祭器) started being used in each regions ceasing to be the tributes to the state. The second period between the early 17th century and the early 18th century saw the appearance of the ritual vessels imitating the everyday vessels with the letter of Je(祭) in Gwang Ju, Kyonggido such as Sundong-lee kiln site(선동리요지). These vessels, however, may not have had a common criterion to follow in making, as they vary in the motif and the height. Also while the metallic vessels became increasingly simplified and schematized, serrate design(鋸齒文) and halgup(할굽) coexisted among the everyday ritual vessels, and 백태청유자 continued to be produced. However, the cauldrons in each region that shared a common production skills in the 17th century as shown with underglaze iron painting(鐵畵文) and omokkup(오목굽) do not seem to have any relation to the production of ritual vessels such as above. It may be because that, during Imjinweran and Byongjahoran, the production of vessels for everyday usage was more important than the one for ritual vessels. The third period from the early 18th century through the 19th century saw the ritual vessels with underglaze cobalt-blue painting(靑畵) letters that were concentrated in Gumsa-lee kiln site(금사리요지) and Bunwon-lee kiln site(분원리요지) of Gwang Ju, Kyonggido. The vessels produced in this period and area had regular patterns in the height of bases and the shape. Since then this pattern became popular in the making of ritual vessels. Also in Sanbon-dong kiln site(산본동요지) of Gunpo and Guirae2-lee kiln site(귀래2리요지)of Wonju, it was found that the ritual vessels that adopted the style of everyday vessels became prevalent throughout the country. Especially the increasing number of ritual vessels in this period may have been brought by the popularization of yehak(예학)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the increase of the yangban in its number. Also unlike the post-19th century the vessels with the letters such as Je(祭), Su(壽), and Bock(福) in this period share a common pattern, which proves the existence of a regulation.;본 논문은 조선왕조의 대표적 儀禮用器였던 陶瓷祭器의 儀禮器로서의 성격과 조형적 특징을 밝히고 도자제기의 생산이 시기와 지역에 따라 어떤 양상을 띠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 도자제기를 실상적으로 파악하는데 그 연구의 목적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해 먼저 조선의 의례적 성격을 살핌으로써 도자제기가 의례행사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祭禮用器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즉, 도자제기는 조선의 건국을 통해 유교 국가로서 禮를 실천하고 왕실에는 권위와 명분을 획득하기 위해 국초부터 실시한 五禮의 준행을 위해 정비된 국가 의례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제기는 형식적 보수성이 특히 두드러지는 의례용기로서 금속으로 제작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금속제기가 조선시대 도자제기로 번안된 이유는 고려 말기부터 지속되어 온 금속 원료인 金銀, 銅鐵의 절대적인 부족이 가장 컸다. 또한 당시 새롭게 권위를 나타내는 高級器皿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청화백자를 비롯한 백자의 생산은 금속제기를 도자기로 대체 생산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이렇게 국가의 의례용기로서 도자제기의 수요가 증가한 것은 1460년대 후반 왕실소용의 기명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官窯의 성립에도 중요한 動因이 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조선시대 제작·사용되었던 도자제기는 크게 祭器圖說과 부합되는 기종과 기형의 도자제기와 日常用器를 활용한 도자제기의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이에 15세기부터 편찬되기 시작한 五禮儀와 儀軌에서 보이는 祭器圖說을 기준으로 현존하는 도자제기를 찾아본 결과 보, 궤, 爵, 彛, 尊(犧尊, 象尊, 著尊, 산뢰, 山尊, 尊), 盞, 香爐, 이(주전자) 등이 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들 圖說과 금속기를 비교적 충실히 모방한 도자제기는 특히 세종연간 명령된 도자제기의 제작·생산과 관련이 있으며, 南海神祠 유적에서 밝혀졌듯이 국가의 中·小祀나 왕실 俗祭에서 사용되었다. 일상용기를 활용한 도자제기에는 鉢, 皿[접시], 甁이 있는데 대부분「祭」와 같은 명문이 있거나 그릇에 높고 각이 진 굽을 부착하여 제기임을 표시하였다. 일상용기가 도자제기로 사용된 것은 사대부는 제기를 燕器, 즉 일상기로 사용하라는《朱子家禮》가 보편화되면서 일어난 현상으로 생각되며, 특히 왕실의 속제에서도 이러한 기명의 도자제기를 사용한 것이 확인되어 당시 王朝禮에도 사대부의 禮가 적용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가정을 세우게 되었다. 또한 실제 도자제기가 생산된 지역을 크게 京畿道 廣州 일대의 窯址와 경기도 광주 이외의 요지로 나누어 살펴본 결과, 시기와 지역에 따른 요지별 특징이 발견되었으며, 이를 통해 도자제기의 편년도 가능하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요지 출토 상황을 비교하여 조선시대 도자제기의 편년을 3期로 나누어 보았다. 1期는 15세기 전반에서 16세기 후반까지로 도자제기의 제작은 금속제기를 모방한 도자제기의 생산을 위주로 日常用器를 활용한 祭器가 극소수 출현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경기도 광주 일대에 관요가 설치되지 않았던 15세기 중반까지는 각 지역의 가마에서 貢納자기의 성격으로 도자제기를 생산하였으며, 이 당시 도자제기의 재질은 象嵌·線刻粉靑沙器가 대종을 이루고 있었고 白瓷는 극히 일부가 제작된다. 전라도 광주 충효동요지가 대표적인 가마다. 같은 시기 경기도 광주 지역에서는 금속기를 모방한 도자제기는 극소수였다. 15세기말부터 16세기에는 鐵畵·귀얄粉靑沙器와 백자로 제작된 이전보다 단순화와 형식화가 진행된 도자제기가 계속해서 생산된다. 이러한 변화는 관요의 성립 이후 더 이상 분청사기제기를 국가에 공납하지 않고 지방에서 대부분 소용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2期는 초반을 제외한 17세기 전반 이후 18세기 초반까지의 시기로 17세기 전반 이후 경기도 광주 일대의 선동리요지 등에서는 새롭게「祭」자명이 시문된 일상용기 형태의 도자제기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때까지 확실한 제작기준은 없었던 듯 문양 시문이나 굽 높이 등이 모두 제각각이다. 한편으로는 점점 금속제기의 간략·단순화와 도식화가 일어나면서 금속기의 특징적 요소만을 차용하여 강조한 鋸齒文이나 할굽 제기가 일상용 제기와 공존하고 白胎靑釉瓷가 계속해서 제작된 시기였다. 그러나 17세기에 鐵畵文과 오목굽의 자기제작이라는 동일한 제작기법을 공유하였던 각 지역의 가마에서는 당시의 이러한 제기제작과는 그다지 관련을 맺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결과 각 지역의 가마에서는 제기와 같은 의례용기보다는 일상생활기명의 제작이 더욱 절실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3期는 18세기 전반 이후 19세기까지인데 경기도 광주에서는 금사리요지와 분원리요지를 중심으로 제기제작에 청화로 문자를 시문하거나 2~4cm의 굽 높이와 저부에서 한번 꺾여 올라가는 기형으로 발과 접시 기형에 일관된 조형성을 갖게 된다. 이렇게 굽의 높이를 높이거나 면을 깍은 형태는 이후 보편적인 제기제작방식이 되었던 듯 하며, 군포 산본동요지와 원주 귀래2리요지 등을 통해 일상용기를 활용한 도자제기의 특징적 규범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공유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도자제기의 수량이 증가하는 것은 이 시기에 있어 가장 주목되는 점으로 조선 후기 예학의 보편화와 양반신분의 증가, 관요의 생산과 수급의 변화 등 사회변동이 원인이 될 것이다. 또 이 시기 祭·壽·福자문이 있는 기명들은 동일한 양식을 보이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19세기 이후 의례용기들 간의 사용에 있어 이전 시기와 달리 엄격한 규제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서로 혼용하게 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Fulltext
Show the fulltext
Appears in Collections:
일반대학원 > 미술사학과 > Theses_Master
Files in This Item:
There are no files associated with this item.
Export
RIS (EndNote)
XLS (Excel)
XML


qrcode

Items in DSpace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

BROW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