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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京國民政府時期(1928-1937) 浙江省의 小學敎育擴大와 國民養成

Title
南京國民政府時期(1928-1937) 浙江省의 小學敎育擴大와 國民養成
Other Titles
南京國民政府時期(1928-1937)浙江省的小學敎育擴大和國民養成 -以浙江省蘭溪縣爲例-
Authors
崔恩珍
Issue Date
2005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Keywords
小學敎育擴大政策南京國民政府國民黨浙江省蘭溪縣杭州市輔導制度短期小學小學敎師敎育經費義務敎育初等敎育附屬小學中心小學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Doctor
Advisors
金稔子
Abstract
本고想관察以浙江省란溪현위例, 南京국民政府시期政府的小학교育확大政策在浙江省是즘양실施的。종近代교育史저개方面래看,南京국民政府시期是采取各총措施래普及小학의무교育的시期;종政治方面래看,南京국民政府시期是위了모求국民政府的成立而통一국民和양成국民的시期。 但是南京국民政府병몰有실현完全的통一。南京국民政府내部存在着各派之간的矛盾,共산黨的挑전, 外部面림着日本的侵略。所以,通과以黨治국래完成국民국家建설저개任무무不是一件容易的事。 위了달成국民국家建설저개目표,南京국民政府通과교育래실현국民완成。南京국民政府시期的학制原封不동地照搬了1922年新제制里所규定的6、3、3、4학制。根据저개학制,初等교育的前四年被定위의무교育。병且把前四年命名위初급小학,后랑年命名위高급小학。但是南京국民政府시期환存在着각易小학、短期小학、一年制短期小학,량年制短期小학等各층各양的小학。저就意味着政府위了확大小학교育而采取了各충措施,而且환意味着政府만足了당시교育界的要求。 교育的대象不근是인童而且无文化的成人也成위了교育的대象。종저一点可以고계到推廣小학교育확大政策的과程一定是相당복잡的。 由于저개原因,南京국民政府실行了中央집政化和통一化。교育體系也是一양。首先南京국民政府成立了교育部體系,병且환確定了교育原칙,저就是三民主의교育。政府把타具體地관철실施在各개地域。浙江省也包括在내。 在浙江省실施的三民主의교育的대象不근是인童,점점地환把몰能受到교育的成人也包括在내。종저一点可以看出三民主의교育原칙是국民양成。타是以保甲制度위基출병且通과小학的成立和管理而실현的。具體래설,南京국民政府是想把국民培양成위了국家利益而不惜희牲개人利益的人。 在국民양成的背景下,南京국民政府消除了省自治的主장而且在政治和경제的建설과程中把浙江省定위重要的통治地域。병且교育體系方面,在교育청成立的同시强化了보도制度。저是深入관 철政府교育方침的主要措施。1920年以래,보도制度由各현的교育희결合而成的浙江省교育희的교育活동래계承的。수然浙江省교育희已경解體了,但是南京국民政府시期附속小학的교育活동유持了以往교育界的活동,所以타和浙江省교育청有着긴密的관系。 浙江省교育청利用保甲制度着重培훈校장和교사병且重시학校的管理。저是因위수然주集교育경비是당前最긴急之事,但是在현실조件下却无能위力。所以위了彌보현실조件的不足只好采取了强化方案的措施。政府的志向是학校교育的군事化和生산化,所以대校장和교사的管理在관철政府意志上起到了?大的作用。병且把小학作위地域建설的据点,在교사和小학的참여下,私塾也成위了近代的교育机관。 浙江省的통制경제政策和保甲制度的完善以及대共산黨征伐等原因加速了小학교育확大政策的실施。1936年短期小학的확大上可以看出初步的成果。在日本不단的侵略下杭州的교사和小학生문也참加了抗日운동。저都是국民양成的시도所取得的成果。 령外浙江省的란溪현被指定위中央政府的실험현。당시民간的향村建설운동강강取得了一定的成적,위了실行현自治就把란溪현作위실험장所。란溪현民간的향村建설운동然采取了通통과育실현建설的方案。但是最重要的是란溪현把政府的政策放于首位,교育也是在타的基출上진行的。 但是교育조件的改善是最위긴迫的,因此현政府위실行中心小학的整비、교사和校장的管理、교育내容的提高、短期小학的확大,私塾的整비等作出了흔大的努力。당시浙江省各현的교育情황都是大同小이的。현政府主도了小학교育的확大,병且通과타현政府的各총政策和措施也取得了흔大的成效。 종上所述,南京국民政府시期국民양成是通과小학교育확大政策而실현的。在省和현的行政편制下교育청和교育科的成立여보도制度等被深入地관철到了현단位。수然저양的行政편制和以管理위主的政策不能引도大중主동地去接受교育,但是却위교育事업的발展奠定了基출。병且국民通과교育形成了국家관念和抗日意식。수然란溪현병不能完全代表整개浙江省,但是通과中央政府的小학교育확大政策在위현政建설更친一步地위국家建설而공헌的국民的양成上取得了一定的成적。;본고는 남경국민정부시기 정부의 소학교육확대정책이 浙江省 지역에서 어떻게 실시되었는가를 蘭溪縣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남경국민정부시기는 중국의 近代敎育史 측면에서 보아도 초등교육수준의 소학교육을 의무교육화 하려는 노력이 여러 차례의 시책을 통해 전개되었던 시기였으며, 정치사적 측면에서도 국민정부의 성립을 도모하기 위한 국민통합과 양성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경국민정부는 불완전한 통일을 이룩한 것으로 내적으로 각계파간의 갈등, 공산당의 도전과 외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맞고 있었기에 以黨治國을 통한 民生國家의 건설이란 과제를 실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과제를 실현하는 중요한 방안으로 남경국민정부는 교육을 통한 국민의 양성에 주목하였다. 남경국민정부시기 학제는 1922년 신학제에서 규정된 6.3.3.4의 학제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었는데 이에 의하면 초등교육은 6년으로 앞의 4년간을 의무교육으로 하도록 하였다. 이 4년간을 초급소학이라 하고 후 2년을 고급소학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런데 남경국민정부시기에는 이외에도 簡易小學, 短期小學, 一年制 短期小學, 二年制 短期小學 등 다양한 형태의 소학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소학교육확대를 위한 여러 시책을 정부에서 내놓았음을 의미하며 당시 교육계의 요구를 나름대로 수용한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교육의 대상도 단순히 아동만을 대상으로 한 소학교육을 실시했다기보다는 교육받지 못한 문맹의 성인도 그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소학교육확대정책의 실현과정은 매우 복잡다단한 것이었다. 그 까닭은 남경국민정부가 중앙집권화, 통일화를 지향하였으며 교육체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인데 남경국민정부는 제도적으로 교육부 체제를 성립시키고 교육원칙을 정립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삼민주의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을 각 지방에 관철시키는 과정을 밟아나갔으며 이는 절강지역에서도 나타났다. 절강지역에서 실시된 삼민주의교육은 그 대상에 있어서도 점차 아동뿐 아니라 교육받지 못한 성인을 포괄하여 삼민주의교육원칙에 부합하는 국민으로 양성하려는 양상을 띠었다. 이것은 保甲制度로 뒷받침되고 소학의 설립과 관리를 통해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남경국민정부의 민생국가이념을 수용하고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국민의 양성이었다. 이러한 국민양성의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는 절강성의 경우 남경국민정부의 성립과 함께 省自治의 주장은 소멸하고 정치, 경제적 건설과정을 거쳐 남경국민정부의 중요한 통치지역으로 자리매김한 것이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 속에서 교육체계도 교육청의 설립과 함께 輔導制度를 강화하였는데 이것은 정부의 교육방침이 침투할 수 있는 주요한 장치가 되었다. 보도제도는 1920년대 이래 각 縣차원에 존속하던 敎育會와 이것이 기반이 되어 결성되었던 절강성교육회의 교육활동이 계승된 것이기도 하였다. 비록 절강성교육회는 해체되었으나 남경국민정부시기 부속소학의 교육활동을 통해 기존 敎育界의 활동이 이어진 것으로 절강성 교육청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절강성 교육청의 보도제도는 소학교육확대정책을 실시하는데 필요한 외적인 틀과 내용을 확보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절강성 교육청은 보도제도를 활용하여 교장과 교사의 훈련을 비롯한 학교의 관리에 주력하였다. 이것은 교육경비의 마련이 가장 시급하였지만 현실적인 여건이 따르지 못하자 이를 보완하기 위한 방안으로 강화된 것이었다. 이러한 교장, 교사에 대한 관리는 학교교육의 군사화, 생산화를 지향하는 정부의 의지를 관철시키는데 기여하였다. 또한 소학교를 지역의 건설을 위한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私塾도 이러한 교사, 소학의 관여로 근대적인 교육내용을 가르치는 기관화되기에 이르렀다. 절강성의 통제경제정책과 보갑제도의 완비, 공산당에 대한 토벌 등은 소학교육확대정책을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1936년 후반 경에는 단기소학의 확대를 통해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 되면서 杭州에서 일어난 교사들과 소학학생들의 항일운동의 참여는 국민의식이 표출된 것이라고 볼 때 국민양성의 시도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인다. 한편 절강성의 난계현은 중앙정부에서 實驗縣으로 지정된 곳이었다. 당시 민간의 향촌건설운동이 성과를 보이자 훈정시기 과제인 현자치를 시행할 기반마련을 위한 실험장소로 선정된 것이었다. 난계현은 민간의 향촌건설운동에서 교육을 통해 건설을 이루고자 하는 방안을 수용하였지만 무엇보다 정부의 정책을 우선하였고 교육도 이를 뒷받침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교육의 행정적인 기능을 부과하기에는 교육여건의 개선이 시급하였고 따라서 현정부도 중심소학의 정비, 교사와 교장에 대한 관리, 이를 통해 교육내용의 질적인 제고, 단기소학의 확대, 사숙의 정비, 사립학교의 정비 등을 시행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절강성 각 현의 교육실태와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난계현 현정건설의 성과는 절강성 각 현 뿐 아니라 중앙정부에서 수용되었는데 교육국을 교육과로 정비한 것 등이 그것으로 이는 현정부에 교육사업이 포괄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정부가 소학교육의 확대를 도모하고 이를 주도하는 것으로서 이를 통해 현정부의 여러 정책이나 시책도 효과를 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본다면 남경국민정부시기 국민양성은 소학교육확대정책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는 성과 현차원의 행정적 편제를 통한 교육청, 교육과의 설립과 보도제도 등을 통해 현차원까지 침투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행정적 편제와 관리위주의 정책이 대중들의 자발적인 교육참여를 유도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을지라도 교육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는 틀을 성립시키는 데는 기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교육을 통해 국가관념의 양성이 이루어져 항일의식을 형성하는데 기여한 측면도 보인다. 난계현의 사례를 절강성 전체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중앙정부의 소학교육확대정책을 통해 현정건설을 도모하고 나아가 성건설 및 국가건설에 기여하는 국민의 양성은 어느 정도는 그 성과를 달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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