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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권력과 미술의 관계에 대한 연구

Title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권력과 미술의 관계에 대한 연구
Other Titles
A Study on the Relationship of Power under the First Regime of Korea and Art
Authors
趙恩廷
Issue Date
2005
Department/Major
대학원 미술사학과
Publisher
梨花女子大學校 大學院
Degree
Master
Advisors
洪善杓
Abstract
권력이란 사회적으로 행동하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폭력이다. 훈련된 통제, 합리적이거나 조작적 설득, 유인 그리고 보복으로 구분할 수 있는 권력은 권위에 의해 합리화된다. 미술에서의 권력이란 미술가와 작품에 직, 간접적인 강제성이 행해지는 사회의 간섭 내지 통제라 할 것이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에서 권력에 대한 미술의 위치는 통제의 대상이자 권위를 세우기 위한 주체의 동반자로서 분명한 경계를 지을 수 없다. 제1공화국은 건국에 이은 國家政體를 형성하여 가는 과도기에 따른 국민의 형성, 남북 분단에 이은 한국전쟁을 통해 일층 강화된 반공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회였다. 광복 직후 美軍政을 겪고 나서야 1948년에 수립된 제1공화국은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전쟁체제 아래 정부조직을 재정비하였다. 그 결과 이승만 정권은 국가권력으로 급부상하여 광범위하고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제1공화국기의 미술제도는 〈국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쟁을 겪으면서 양산된 것인 만큼 時局性이 강한 것이었다. 미술정책은 강압적인 국가권력에 의하여 제도화되었고, 미술인은 그 미술정책 아래 자발적 참여의 형태로 동원되었다. 제1공화국의 미술제도, 단체, 전람회를 통해 권력과 미술의 관계를 분석할 수 있다. 제1공화국기에 한국의 근대화단이 생성된 이후 가장 대규모로 결집한 미술단체가 처음 등장하였다. 미술가들이 사회적 신분에 대한 의식을 하고 있었고 이러한 사회적 신분에 대한 인식은 국민으로서 미술인의 책무를 인식하는 통로이므로 국가 또는 정부 권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많았다. 미술작품이 관객을 대면하는 전람회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처럼 권력에 의해 조직되고 운영되었을 때, 작품 또한 권력의 주체가 의도한 목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회에서 작품이 소통되는 경로를 손에 쥔 권력에 의해 작품은 선택되고 결국 미술인은 선택적 작품을 생산하게 되었던 것이다. 비상체제에서 국가가 운영한 종군화가단 같은 제도는, 이 제도가 시행되지 않았을 때 예견되는 강력한 국가의 보복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권력에 봉사하는 미술의 합법성을 제공하는 배경이 되었다. 〈국전〉에서도 미술작품의 사회에 대한 책무를 강조함으로써 권력에 의해 미술이 통제될 수 있음을 명시하였다. 또한 국가나 정부의 권력이 정치적 의도로 미술작품에 관여될 때 전통을 원용할 수밖에 없었다. 제1공화국기는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국민국가 만들기의 시기였던 때문이다. 국가 미술진흥책이라는 〈국전〉의 순수한 목적은 문교당국의 방만한 운영, 심사위원 추천을 위탁받은 미술단체의 편협성, 심사위원을 맡은 인사들의 비도덕적인 담합 등으로 설립초기부터 합리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국전〉의 파행운영은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 강력한 반공체제를 구축하려는 시도에서 전람회를 시행하고, 미술인을 동원한 결과였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국립박물관이 주관한 〈현대미술작가초대전〉은 당시 중견 이상의 작가들을 초대하였다. 이 전시회는 기성 화단의 중진 이상을 국가기관의 전시실에 ‘현대미술작가’로 초대함으로써 〈국전〉을 발판으로 활동한 아카데미즘 작가들을 옹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제1공화국 후반기에 조선일보사에서 개최한 〈현대작가초대미술전〉은 국전에 상대되는 야전을 주창하였음에도, 전시회의 목적이 신문의 영향력 증대를 의도한 정치적인 것이었으므로 진정한 의미의 野展은 이루지 못하였다. 신문은 늘 새로워야 하고 미술에서 추상, 앵포르멜은 새로운 것이었으므로 미술의 모던 이미지에 신문사가 편승하려 하였던 것이다. 한국전쟁 때 조직한 종군화가단과 표면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유격대에 미술인도 있었다. 전쟁은 선전미술을 생산하였고 그 생산에 강력한 권력이 관계하였다. 한국전쟁기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정보가 확산된 시기이자, 그 어느 때보다 자발성이 강하게 국가의 이념에 맞는 그림이 필요, 양산된 때였다. 그런데 전쟁의 경험은 미술가에게 체험의 응축으로 나타나지 못하였기에, 한국전쟁기 제작된 많은 작품에서는 서구세계의 모방, 그를 통한 동일시의 과정을 보게 된다. 이 시기 국가에서 필요로 한 미술은 국민에게 전쟁을 통한 반공의식을 고취시키고, 한국전쟁이 수치의 역사가 아니라 반공의 최전선에서 영예로운 자유수호의 聖戰을 인식시키는 선전 도구로서의 미술이었다. 한편 제1공화국기에는 그 어느 시기보다도 자주 위정자를 위한 온갖 종류의 기념물이 세워졌는데, 대부분 국가 주도로 이루어졌으나 때로는 국가 권력에 알아서 복속한 미술인에 의하여 시도되기도 하였다. 오랜 해외 망명으로 국내 기반이 없었던 이승만은 장기집권을 획책하고 정통성을 인정받을 목적으로 과거의 이미지를 이용하였다. 의례공간으로 정비된 조선총독부 건물 앞에서의 대통령 취임과 건국 선포는 장소에 대한 편승을 의미하며 그 장소성은 이제 조선왕조의 정통성에서 일본의 극복 그리고 미군의 전폭적 지지를 얻은 이승만 정부라는 이미지를 의도한 것이었다. 장기집권을 꾀하기 위한 이승만 자신의 우상화 작업도 동상 건립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항전한 남한산성에 세워진 이승만 송수탑, 3.1만세운동의 기념장소인 탑동공원, 광복의 상징으로 남산 조선신궁을 헐고 그 자리에 세운 이승만 동상, 남산 순환도로를 개설하고 정자를 지은 다음 이승만의 호를 따서 명명한 우남정, 용두산공원을 재개장하며 이름을 바꾼 우남공원 등과 중앙대학교와 대전의 우남도서관, 이승만의 모교인 배재학교의 우남학관, 남한산성의 이승만 대통령 송수탑과 파주 용미리의 대통령기념탑 등은 이승만의 우상화가 다양하게 이루어진 사실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한국 국민 대부분은 교육받지 못하였으며 광복 이후 남한에서는 미군정에 강화된 반공노선으로 그나마 가진 인적 자원의 손실을 입었다. 또한 支配階級이었던 친일파는 미국에 의해 보호, 육성되어 그대로 한국의 官僚로 자리잡았다. 반일을 앞세운 이승만 정부이지만 실상 관료는 친일세력의 연장이었다는 것은 이 시대의 표리구조를 대변한다. 미술계의 인적 구성 또한 예외가 아니었으며, 제1공화국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전람회인 〈조선미술전람회〉를 〈국전〉으로, 한국전쟁 때는 군국주의적인 러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때 조직된 적이 있었던 종군화가단이 미술가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구성되었고, 일본의 교조적인 인물의 동상 제작 경험은 한국의 위인을 조형화하는 데 있어 양식적으로는 별반 차가 없는 동상을 양산해내었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은 식민지를 겪은 신생국가의 문제점에 더해 국내 지지기반이 약한 이승만이 지도자가 됨으로써 대내적인 정권의 정통성 증명에 대한 압박이 정치형태로 구현되었다. 한국전쟁을 통해 국가 위기 시 동원된 미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기억에 의해 형성된 미술계 내부에서의 권력은 제1공화국기 미술이 국가적인 제도에 의해 운영되고 평가받은 결과였다. 극심한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형식의 다양성을 확보하지 못했던 제1공화국기 미술은 국가의 정치적 형태가 미술에 과도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증명한다.;The study on the relationship of the power under the first regime of Korea and the art was undertaken as an extension of interest of arts in 1950s. All art works of first regime of Korea were the outcome that were buried under the ideology, power or capitalism. However, artists are located within the history of themselves, and the works reflect the social experience themselves. No one has been free from the society and history, and the presumption was made that aesthetic formation also derived from the historic experience, and the study was undertaken what position art had in relation to the power under the first regime, what implication does it have as an art phenomenon, what is to accomplish for art circle when it accommodated the power of the state, and what did the nation or Rhee Seung-man personally tried to accomplish with art and other topics. Power is a social violence applied on the person who are acted in social terms. Power that can be classified into the trained control, reasonable or manipulative persuasion, inducement and retaliation rationalizes by the authority. Power within art means the social intervention or control undertaken with the direct or indirect compulsory nature on artist and art work. The position of art on power under the first regime of Korea was the subject of control as well as the accompanied party of main subject for its authorization without clear boundary within. The biggest reason for it is that the first Republic was not free from the forming the national consensus during the transition period to building up the national identity and even more strengthened anti-communism through the Korean-War following the national demarcation. Immediately after the independence, Korean experienced the governance of the US military, and established its first administration in 1948, and as it went through the Korean War, the government organization was regrouped under the war situation. As a result, the Rhee Seung-man regime emerged as the national power and asserted powerful and broad influence. The art system in the first regime had strong political implications since they were produced from the Korean war with the exception of 〈Kukjeon (Korean Art Exhibition)〉. The art policy was systematized under the oppressive national authority and the artists were mobilized in the form of the voluntary participation under the art policy The innocent purpose of under the name of national art promotion policy did not operate as reasonably as purported from the beginning of its establishment with the reckless operation of the authorities, biased art organizations who were consigned for recommendation of reviewing members, unethical collusion of persons who were undertaken the review. Such a turbulent operation of 〈Kukjeon〉 was the result of implementing the exhibitions and mobilizing the artists in an attempt to structure powerful anti-communism by the first regime. During the period of the Korean War, the National Museum held the 〈Invitational Exhibition of Contemporary Artists〉 with the leading artists of the time. This Exhibition invited 'contemporary artists' to the exhibition halls of national institutions with the established artists that it bought the result of defending the academism artists who were active based on 〈Kukjeon〉. In addition, , held by Chosun Ilbo at the later part of the first regime, advocated the art works contrasting to , but since the objective of the exhibition was political one attempted for the increase in influence of newspaper that the true meaning of field exhibition was not achieved. The newspapers had to be new at all times and the abstract and Informel in art were all new that the newspapers were attempting to jump on the bandwagon in the modern image of art. During the Korean War, there were military artist group organized and artists were active in the military units, although these facts were not appeared on the surface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ower and production of the propaganda in art during a war was contemplated. The time of the Korean War was to spread of information on new world as well as needed for the appropriate national ideology in paintings that display the voluntary independence. However, the experience of the War did not show in the condensed form of experience for artists that many works produced during the Korean War displayed the imitation of western world, and the same procedure through the experience. Furthermore, the art in this period was a way of propaganda to heighten the sense of anti-communism through the war for people, and make people to recognize the Korean War, not as a history of national disgrace but a holy war to defend freedom in the front line of anti-communism. Through making the statue of great people or sacred places, Rhee Seung-man created the ‘image of founding father of the nation’. In the building of Joseon Governor-General Administration well arranged for diplomacy space, Rhee Seung-man had his inauguration of presidency and declared the founding of the country, which implied the jumping on the bandwagon for its place, and the meaning of the place is to overcome of Japan from the legitimacy of Joseon Dynasty and the image of the Rhee Seung-man regime who had the full support of the US military. In the meantime, during the first regime, there were many monuments of all types for the political leaders, mostly led by the government, but sometimes, the artists voluntarily attempted to build one in self-obedience to the national power. Rhee Seung-man who did not have solid foundation within the country due to the long exile on overseas schemed for using the past images for the purpose of planning for long-term power and recognition of legitimacy. The idolization works for Rhee Seung-man in an attempt for long-term seizure of power were made through the building of his own statues as well. There have been many statues made for Rhee Seung-man Songsutop (Monument) erected in Namhan Fortress where King Injo fought against Chinese invaders, Rhee Seung-man statue erected on Namsan Chosun Singung (Palace) that he abolished as a symbol of independence, opening up Namsan Belt-way with a pavilion with the name of Woonam-jeong (Pavilion) for the poetry name of Rhee Seung-man, revamping of Yongdusan Park to rename in Woonam Park, and Woonam Library in Joongang University and Woonam Library in Daejeon, Woonam Hall in Rhee Seung-man's alma mater, Baejae School. The statues of great people under the first regime was the reproduction of the past that the statue of Rhee Seung-man was produced as a device for striving the new future of people. During the Japanese colonization period, most of Koreans were unable to receive education, and after the independence, South Korea had the anti-communism lines under the US military governance that it had the crucial blow to the human resources. In addition, the controlling class, the pro-Japanese sector, was protected and developed by the US to take the important government positions in Korea. The Rhee Seung-man regime that had great noise as anti-Japan but it actually was an extension of pro-Japanese line in direct contradiction of the time. During the period of the Korean War, the human resources in Korea had seen the complete depletion by the cross murder of extreme confrontation of right and left along with the sacrifice of entire people. The first regime of Korea had the problems in newly independent state with the experience of colonization, and on top of that, Rhee Seung-man who had vulnerable support base became the leader that the internal pressure on verifying the legitimacy of administration was materialized in the political formation. Through the Korean War, art was mobilized in times of national crisis, and the power within the art circle formed by the memories that continued even after the war was the outcome of operation and assessment by the national system under the first regime. Due to the extreme anti-communism ideology, the art under the first regime could not secure its diversity and it has proven that the political shape of a nation could make excessive influence in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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