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 29 Download: 0

제헌국회 의원들이 구성한 ‘국가’와 ‘국민’의 의미화 분석

Title
제헌국회 의원들이 구성한 ‘국가’와 ‘국민’의 의미화 분석
Other Titles
THE SIGNIFICATION OF 'THE STATE' AND 'THE NATION' BY THE CONSTITUTIONAL ASSEMBLY
Authors
송은경
Issue Date
2004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회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dvisors
김우식
Abstract
이 논문은 제헌국회의 국회의원 200여 명의 제1회 본회의를 분석대상으로 삼아, 제헌국회 의원들이 국가를 구성했던 순간에, “어떻게 국가와 국민을 이해하고 의미화했는가”를 밝히고자 했다. 연구자는 이를 문화·역사사회학 관점에서 이데올로기, 의례, 제도와 제도화라는 세가지 분석적 차원으로 나누어 고찰했다. 또한 세가지 분석들을 통해서 추출된 표현과 상징들은 제헌국회 의원들이 어떤 ‘질서’를 구상하고자 했는지를 상징과 의미를 통해 밝히고자 했다. 첫째, 제헌국회 의원들은 ‘주권의 회복’을 국가 구성을 위한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으며, 이때 ‘주권’을 ‘조선민족’이 실현해야 하는 최상의 가치로운 것으로 의미화했다. 이 ‘회복된 주권’은 오직 ‘민주주의’와 ‘균등사회의 이념’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주권 회복’과 두 가지 이데올로기의 연결은 상징적 차원에서 국가 내의 ‘중심성’ 구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따라서 ‘주권’은 개인으로서의 국민이 갖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조선민족’ 전체의 단일한 ‘주권’으로 이해되었다. 둘째, 제헌국회 의원들은 세 번의 기념식을 통해서, ‘조선민족’의 ‘주권’을 가시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민주주의’와 ‘조선민족’의 결합은 보다 확고한 것으로 ‘완전 자주독립국가’를 가시화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국민’은 균질적이고 통합적인 ‘민족’과 ‘백성’으로만 의미화되었다. 따라서 ‘민족정신’과 같이 통합적인 사회질서를 강조하는 의례 제도들은 법률화되었으나, 균질적인 사회 집단의 구별과 균열을 표면화시키는 제도들은 법률화되지 못하였다. 셋째, 반민족행위처벌법과 양곡매입법의 제정과정은 의원들이 선택한 이데올로기를 제도화하는 과정이었다. 두 가지 법안은 모두 단일한 ‘민족’과 ‘백성’이라는 상징들을 통해서 사회자원의 분배가 불가능함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반민족 행위’에 대한 규정과 이에 대한 처벌 조항은 존재했으나, ‘누가 반민족 행위자인가’에 대해서는 논쟁만을 거듭했을 뿐이었다. 또한 ‘공민권’ 제한을 핵심으로 하는 처벌조항은 일상적인 사회적 관계들을 표면화시켰으나, ‘민족’과 ‘국민’의 애매한 구별로 인해 논의의 한계에 부딪쳤다. 비교적 논의의 초기과정에서부터 ‘생산자-소비자-조정자’의 구별을 전제로 했던 양곡매입법안은 초기에는 가능했던 사회적 집단화를 오히려 모호하게 만들었다. 생산자인 ‘농민’들은 ‘전민족’을 위해 ‘도의심’을 발휘해야 하는 집단으로 규정되었으며, 소비자와 조정자는 모두 ‘전민족’이라는 규정에 포함되었다. 따라서 제헌국회 의원들은 국가의 구성을 첫째, 주권 회복을 통하여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를 구성하는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그 규정 내에서만 ‘민주주의’와 ‘균등사회’의 이해하고 사회에 적용하고자 했다. 둘째, 이 이해의 범위는 ‘조선민족’과 ‘백성’, 그리고 중심성을 구축할 수 있는 ‘지도자’의 표현 등을 통해서 강력한 상징적 힘을 구성했다. 셋째, 이데올로기들와 제헌국회 의원들의 구상이 현실화 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 간의 ‘경계’를 구성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으나,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구별지을 수 있는 적절한 ‘경계’를 설정할 수 없었다. 모든 논의는 ‘완전 자주독립국가’와 ‘주권’을 회복한 ‘조선민족’에 의지하여만 현실화될 수 있었다. 이 연구는 기존의 ‘국가형성’과 관련한 연구들과 달리, 의사소통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사회적 행위자들의 공통적인 ‘인식의 틀’을 찾고자 노력했다. 이를 통해 제헌국회 의원들은 선택한 이데올로기들을 형식적인 정의 그대로 받아들였다기보다는, 자신들의 구상에 맞추어 이해하고자 했음을 밝혀냈다. 전혀 관련이 없는 듯한 논의들 속에서도 제헌국회 의원들은 ‘민족’을 ‘민주주의’와 연결시키기 위해 많은 수사적 표현들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개별 국민’ 혹은 ‘개인’과 ‘국가’는 ‘전 민족’과 ‘국가’의 관계에서만 논의될 수밖에 없었다. 이 연구는 비슷한 다른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1948년의 제헌국회의 공식적인 의사소통 과정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This thesis focuses on the process of the signification of 'the state' and 'the nation' in the public communication of the constitutional assembly. Newborn Republic of Korea chose two ideologies: 'democracy' and 'the principle of equal distribution.' I start this study from the choice of two ideologies and the construction of the state by the Constitutional Assembly(CA). Critical issues on my thesis are the ways it thought about 'the state' and 'the nation.' Also, how the CA signified their choices and decisions in the procedure of communication. These questions were examined by three analytic dimensions - ideologies, ritual, and institution - in terms of cultural and historical sociology. This study argues as follow: First, the CA recognized the critical mission of 'the recovery of sovereignty.' And, then, 'the recovery of sovereigny' meant what could be only attained by 'the people of Chosun.' Its signification which has the linkage between the recovery of sovereignty and ideologies made the important moral code: the centrality by the people of Chosun and the Completed Independent State.' Second, the three ceremonies and the process of institutionalization of ritual made the connection visual and dramaturgic. For example, the cetemonies symbolized the state and the people of Chosun united. Also, the procedure of institutionalization of ritual visualized the existence of 'the spirit of the people.' The institutionalized laws implied the spirit of Chosun people.' They were effective in 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the unification of ROK in general. They, however, failed to consider personalized people ROK. At last, this failure appeared in the processes of institutionalization of 'the penalty of anti-action for the people(PAAP)' and 'the law of purchasing grain(LPG).' These laws symbolized the distribution of social resources and the institutionalization of the ideal program in real circumstances. The PAAP was in the middle of controversy, and the CA couldn't find the appropriate solution, because there was no standard for categorizing the 'anti-actor.' Eventually, the CA was not able to make the standard of division in 'the people of Chosun.' Similarly, the LPG overrided the appropriate grouping of the society. In accordance with this signification, farmers were only treated as 'brothers of the people,'and forced to have 'brotherly love for the people of Chosun.' This study intended to analyze the frame of common recognition in the CA in 1948. The CA was in the middle of the construction of ROK. In spite of it, Assemblymen acted as representatives of 'the people of Chosun.' Assemblymen in delicate position chose ideologies, constructed social order. The people of 'Chosun' made the strong connection between the state and 'the nation of ROK.' Therefore, social grouping in 'the nation' which make institutionalization of ideologies effective was impossible. This thesis is significant since it pays attention to the construction of 'the state' and 'the nation' in terms of cultural and historical sociology.
Fulltext
Show the fulltext
Appears in Collections:
일반대학원 > 사회학과 > Theses_Master
Files in This Item:
There are no files associated with this item.
Export
RIS (EndNote)
XLS (Excel)
XML


qrcode

Items in DSpace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

BROW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