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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의 官立學校와 私立學校의 比較考察

Title
1880년대의 官立學校와 私立學校의 比較考察
Authors
崔仁淑.
Issue Date
1975
Department/Major
교육대학원 사회과교육전공역사교육분야
Keywords
1880년대관립학교사립학교비교고찰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韓國敎育史에 있어서 1880年代는 近代學校敎育의 始發點이 되고 있다는 點에서 劃期的인 時期라 할 수 있을 것이다. 本稿는 이 時期에 關한 徒來의 個別的인 實證硏究의 成果에 힘입어 우리나라 最初의 近代學校인 官立의 育英公院과 私立의 培材 學堂을 中心으로 敎育史的인 視角에서 比較考察을 시도해 본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의 敎育實踐과도 關聯하여, 1880年代의 우리나라 近代敎育의 視發期에 있어서 代表的인 宣敎系 私立學校와 朝鮮王朝政府가 文明開化施策의 一環으로 推進한 官立學校의 對比에서 그 發展과 挫折의 二面的인 推移를 構造的으로 理解하고 그리하여 우리나라 近代敎育의 基本的 徵表와 그 原型을 歷史的으로 追踐해 봄에 있었다. 그리고 이 官·私立 近代學校의 比較考察을 通하여 이른바 「開化期」의 時代相을 透視해 보고자 하였고 또한 敎育內容 分析을 通하여 育英公院의 學習課業의 失敗의 要因을 究明하므로서, 우리가 거기에서 一定한 敎訓과 反省을 資料를 抽出할 수 있을 것을 期待하였다. 本稿의 導入部로 設定한 2章에서는 1880년 前半期에 우리나라에 「近代的學校」의 形成過程과 그 要因을 當時의 우리나라의 現實的인 要件과 外勢에 依한 자극적인 要素와의 함수關係에서 살펴보았다. 즉 開港을 계기로 高宗과 閔氏寂族政權은 對內的으로는 國政改革을 斷行하여 封建制度를 脫皮하고 文明開化와 富國自强을 일으켜야 했고 對外的으로는 世界史의 潮流에 對應하여 均勢를 確立시켜야 하는 難題에 부딪치고 있었다. 따라서 이에 對應하기 爲한 努力으로 1, 2次에 걸쳐 日本에 修信使를 派遣하였고 特히 金弘集一行의 派遣 結果는 그 후유증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對內的으로 日本에 紳士遊覽團의 派遣, 淸國에 領選使 派遣等 新文物 輸入을 爲한 努力과 統理機務衙問 設置, 別技軍 設置 및 軍事制度改編을 가져와 近代的 體制整備를 하였고 對外的으로는 美國을 비롯한 歐美諸國과의 直接的인 修交와 門戶를 널리 開放하여 對外的인 均勢를 이루고자 하는 等 一連의 努力이 일고 있었다. 이같은 政治·社會의 背景下에서 이제까지의 敎育 對한 심각한 反省과 더불어 새로운 學問을 爲한 諸般 施策을 進求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먼저 美國을 비롯한 歐美諸國과의 修好通商條約의 締結로 歐美 各國語의 通譯官의 養成이 時急한 問題가 되자 政府는 總理機務衙門附屬機關으로 官立의 同文學校를 設置하였다. 한편 같은해에 開港場內에서는 外國勢力의 侵透에 자극된 地方民들 스스로가 自發的인 努力으로 私立의 元山學校를 設立하였었다. 그러나 이 兩學校는 近代式方式을 빌어 敎育을 實施한 이른바 「近代的 學校」의 初發形態로서 우리나라 近代文化 受容 初期에 있어서의 時代的 要請과도 關連하여 登場한 過渡的 所産物이며 近代學校 設立에 架橋的 役割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近代的 學校」의 初發形態인 官立의 同文學校와 私立의 元山學校를 먼저 살펴 보았다. 一般敎育을 目的으로 하는 近代學校는 1886年 西洋의 새로운 文物輸入에 刺戟된 一部 先覺者들에 힘 입은 政府自體의 努力으로 設立된 官立의 育英公院과, 基督敎布敎를 目的으로 入國한 西洋 宣敎師들에 依한 私立의 培材學堂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두 學校의 設立으로 비로서 우리나라가 敎育의 一般化·普遍化를 가져올 수 있는 起點을 形成할 수 었었던 것이다. 따라서 三章에서는 이 官·私立 2學校의 設立過程을 살펴 보았고 特히 敎育內容을 學校의 設立目的, 入學資格, 敎師의 資質, 學習內容, 敎授方法, 學習課業等으로 나누어 分析的 視角에 位한 比較考察을 시도하였으며 公院의 失敗要因도 또한 檢證해 보았다. 그리고 4章에서는 育英公院과 培材學堂의 歷史的 推移를 論證하였다. 1894年의 「東學革命」 및 甲午改革을 비롯한 社會的인 變動要因과도 連關하여 近代的인 諸般制度改革을 劃策한 朝鮮王朝에 育英公院의 □의 經驗은 좋은 敎訓이 되었을 것이고, 國家의 敎育에 對한 關心도 一定한 變容을 겸게 되어 漢城師範學校官制領의 頒布등으로 냐타났다. 아울러 敎育은 어떤 特定階層만을 爲한 것에서 漸次로 脫皮하여 一般化 普遍化 되어지기 始作한 歷史的 推移를 時代的 潮流와 더불어 宣敎系 私學인 培材學堂의 發展志向的인 側面고의 關連에서 論證하였다. 끝으로 本稿는 結論에서 官立의 育英公院이 挫折을 겪게 된 諸般要因과 辰面에 私學인 培材學堂이 發展을 하게 된 要因등을 分析的으로 比較 檢討하였고, 特히 育英公院이 廢止된 그 이듬해인 1895年에 發足한 興化學校등 非宣敎系의 「民立私學」들이 培材學堂등 宣敎系私學에 자극·鼓舞되고 日本의 「敎育的 營爲」에도 抵抗하여 特히 「韓末」 國權回復運動期에 있어서 宣敎系 私學과 더불어 愛國啓蒙運動의 主要한 一翼을 擔當하고 있다는 歷史的 事實과도 關連하여 우리나라 近代敎育의 本流를 그 始發期로 부터 官學보다 私學에 두어야 한다는 結論을 導出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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