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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의 정치사상

Title
김홍집의 정치사상
Other Titles
(A) Study on political ideology of Kim Hong-Jip
Authors
柳希貞
Issue Date
1996
Department/Major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Keywords
김홍집정치사상Kim Hong-Jip역사교육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study on Kim Hong-Jip's balance of power foreign policy and to focus on the ultimate purpose of his foreign policy. Kim Hong-Jip(1842-1896) was a leader who directed Chosun's politics and foreign affairs after opening harbours and tried to modernize Chosun in the way of balance of power foreign policy and gradual reformation. He especially was dominated as SuSinSa on the 23rd March, 1880 and went to Japan, after the visit he he met with Chinese officials. The meeting with chinese officials made him recognize the balance of power foreign policy and he pursued the balance of power foreign policy constantly. This policy was brought from his recognition which Chosun had to be protected from an invasion of foreign powers and to use power balance of foreign countries surrounded Chosun, say, to flourish Chosun. Kim Hong-Jip's recognition for foreign countries was formed when Byeong In Yang Yo and Sin Mi Yang Yo were happened. Especially, Byeong Ja Su Ho Treaty which was singed compulsorily by Japan was heightening a crisis-reognition to foreign countries. Meanwhile, Kim Hong-Jip was sent to Japan as Su Sin Sa to revise unequal treaty affairs with Japan and grasp the situation. At that time Kim Hong Jip brought Hwang Jun-Heon's Chosun Chack Ryack and claimed the necessity of friendly China, tied Japan, linked America. That was, through balance of power foreign policy, to protect Chosun from Russia. And he insisted that the contract with Western countries was able to revise unequal treaty with Japan. After that Kim Hong-Jip as a leader contracted several treaties with foreign countries and practied the balance of power foreign policy. But China interupted Chosun domestic policy because Im Ho Kun Ran and Ka Bo Reformation were resulted in failure. So Kim Hong-Jip focused on domestic policy for ten years. During this period Kim Hong-Jip revised the balance of power foreign policy focused on China, America and Japan and he turned to the balanced of power foreign policy focused on China, Russin, and Japan. Kim Hong-Jip cabinet was established in the situation that Japan conquered Kyeong Bok palace. Kim Hong-Jip's independent reformation was hindered by this situation, but Kim Hong-Jip's cabinet resisted Japan's insistence of five general principles of domestic politics reformations, and established a reform institution and practiced twelve reformation principles included a part of Dong Hak Nong Min Gun's misgovernment reform principles. Finally Kim Hong-Jip pursued Chosun's modernization through the balance of power foreign policy and gradual reformation.;道園 金弘集 (1842-1896)은 개항 이후 조선의 정치와 외교를 주도적으로 추구한 관료로서, 均勢外交政策과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조선을 근대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제2차 修信使로 임명 (1880년 3월 23일) 되어 일본에 다녀온 후 淸관료와의 접촉을 통해 이루어진 균세외교의 인식은 그의 외교정책에 일관되게 추구되어졌다. 이러한 그의 정책은 조선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고 부강하게 하기위해서는 조선을 둘러싼 열강간의 세력균형을 이용하여야 한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김홍집의 대외인식은 丙寅洋擾와 辛未洋擾 등 대외적인 위기에서 형성되었다. 특히 1876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丙子修好條約은 조선의 대외적 위기의식을 한층 고조시켰다. 이러한 시점에서 김홍집은 일본과의 불평등조약의 개정과 동아시아 정세파악이라는 필요에 의해서 일본에 修信使로 파견되었다. 이때 김홍집은 黃遵憲의 『朝鮮策略』 을 가지고 와 親中國·結日本·聯美國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즉 균세외교를 통하여 러시아로부터 국토를 방어하고 서양 여러나라들과 수교를 맺으므로서 불평등한 일본과의 조약을 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홍집은 일본에서 돌아온 후 국왕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균세외교를 통해서만이 부국강병과 국토안위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김홍집은 여러나라와 조약을 체결하는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균세외교를 실행하였다. 즉 그는 조미통상조약, 조영통상조약, 조독통상조약, 대일통상세칙의정, 제물포조약,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등의 全權副官로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과는 회담을 통해 인천개항을 20개월이나 연기하는 성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속에서 유생들은 반대상소를 하는 등 위정척사운동을 벌였으나 국왕은 김홍집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파견하는등 균세외교정책을 펴 나갔다. 그러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실패로 淸의 내정간섭이 강화되자 약 10년간 外治에서 배제되면서 김홍집은 대내정책에 치중하였다. 이 기간 중 김홍집은 1880년대에 추구하였던 淸·美·日 중심의 균세외교를 수정하고 1890년대에는 淸·露·日의 균세외교로 전환하였다. 그 후 일본은 동학농민운동을 기회로 한성에 입성하였고, 내정간섭을 자행하였다. 이때 정부는 일본의 內政改革綱領 5개조 요구를 거부하고 校正廳을 설치하여 東學農民軍의 弊政改革案의 일부를 반영한 12개조의 개혁을 실시 하는등 자주적인 개혁을추구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일본은 景福宮 점령을 통하여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대원군을 내세워 新政府를 수립하였다. 김홍집내각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속에서 수립되었다. 그리하여 군국기무처의 의장으로 개혁을 추구하였다. 군국기무처의 개혁을 보면 재정을 탁지아문으로 일원화하고, 과거제도폐지, 죄인연좌법폐지, 공·사 노비법의 혁파, 조혼엄금, 과부의 재혼문제등 근대적인 개혁을 추구하였다. 비록 은본위제를 채택하면서 발행이익이 높은 백동화를 많이 발행하여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였고, 외국화폐를 사용할 수 있게하여 일본화폐의 침투를 법적으로 마련해주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지만 김홍집은 자신이 평생 추구하였던 개혁을 위해 일본에 의해 성립된 갑오정권의 수반이 된 것이다. 그는 2차 내각에서 박영효와의 대립으로 총리직을 사퇴하였지만, 박영효의 해외망명으로 다시 정권을 잡고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김홍집은 결국 아관파천으로 사망하기까지 균세외교와 점진적인 개혁을 통한 조선의 근대화를 추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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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대학원 > 역사교육전공 > Theses_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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