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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space.ewha.ac.kr/handle/2015.oak/171280
2024-03-29T01:20:06Z음식문화로 본 도교 양생철학에 대한 일고찰
https://dspace.ewha.ac.kr/handle/2015.oak/265834
Title: 음식문화로 본 도교 양생철학에 대한 일고찰
Ewha Authors: Yang, Juan
Abstract: 양생사상은 동아시아 음식과 건강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동아시아의 전통철학인 양생사상은 인간이 신체의 건강을 얻는 방법으로 무엇을 제시하였을까? 중국 역사에서 도교는 오랜 시간의 발전 과정을 거쳐서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사상체계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도교는 그 신비주의적 성격 때문에 외부로 잘 알려지지 않았고, 유교와 불교에 비해서 그다지 학문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도교의 사상이 음식과 건강의 문화에서 갖는 의미는 적지 않고, 조선 후기에도 많은 학자들이 도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이 분야로 총서류를 남기도 하였다.
본고의 목적은 동아시아의 역사와 전통사상에서 두각을 나타낸 도교의 양생 이론, 사상가, 그리고 그들의 방법론을 정리하고 그 대략적인 윤곽을 살피는 것이다. 도교의 양생 사상이 전파된 사례로서 조선 후기 양생사상의 특징도 아울러 고찰할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가족 이념의 정착과 확산을 토대로 삶의 현실적 모습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에 성리학의 의리와 윤리에 가려져 있던 양생의 가치가 새삼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도교양생법에 대한 현대인의 인식을 바로 하고 지금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본 연구는 동아시아 도교의 음식 양생 철학을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필자는 전통 도교 서적을 통해서 음식 양생 철학을 소개하고 싶다. 왜냐하면 도교는 수천년의 발전과 실천을 거쳐 역사 경험이 풍부한 양생 사상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전통적 양생사상을 고찰함으로써 현대사회 사람들에게 시사점을 제공하고 싶다.
특히 필자는 동아시아 도교의 음식 및 양생 문화를 6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분석하려고 한다. 각기 다른 시기의 6권의 저서를 사용하였다. 먼저 장자로 대표되는 도교 사상가들은 양생을 수행으로 여겼다. 사람의 생명은 짧지만 지식은 무궁무진하다고 여겼다. 장자는 수행자가 장생을 추구할 때 음식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의 평온을 추구해야 장생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다. 둘째, 동한 태평경에서는 중인귀생의 양생 철학사상을 제시하였다. 이는 인간의 생명이 천지와 똑같이 중요한다는 사상이다. 그래서 양생과 오장, 음식의 철학 등 장수를 실현할 수 있는 일련의 관점을 제시하였다. 즉, 오장의 건강 여부는 음식이 깨끗한지, 오장의 운행에 적합한지에 달려 있다. 셋째, 남조 양성연명록은 무병장수와 관련된 많은 금기사항들을 제시하고 있으며, 특정한 식이요법을 통한 양생의 실현을 주장하였다. 그 중 도교양생들은 실천적 식이요법을 통해 금기의 합리성을 증명하였다. 넷째, 한나라의 황제내경은 약식동원론을 제시하고 초기 도교의 양생철학을 반영하였다. 초기 도교는 약물을 복용함으로써 불로장생을 추구하였기에 광석, 금은 등의 유해물질을 포함하였다. 하지만, 수천 년의 실천을 거쳐 서서히 음식으로 약을 대체하고, 음식은 음양의 변화에 부합해야 하며, 오장이 무취와 상응하게 정확하고 합리적인 식사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다섯째, 당나라 천금방은 식이요법을 제시하여 식이요법을 통해 인체의 보양을 실현하고 약물을 복용하여 신체 질환을 치료하였다. 식이요법을 통해 인체의 사기를 배출하여 인체의 혈액 순환을 정상적으로 실현하고자 하였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조선후기 규합총서로 대표되는 음식양생책을 통해 이 책의 저자인 빙허각 이씨가 도교와 인연이 깊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책에는 음식금기에 관한 내용이 황제내경이나 천금방과 유사점이 많다. 이 책 역시 음식양생을 중시하여 조선후기 생활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를 통해서 이 글은 전통 도교 사상과 동아시아 음식 문화의 관계를 밝히고자 있다.
;本研究旨在了解東亞道教飲食養生思想。在這裏我想通過傳統道教書籍來介紹飲食養生思想,因為道教經過幾千年的發展與實踐,形成了歷史經驗豐富的養生思想。我認為現代養生思想的關注點有很多脫離傳統社會的經驗,所以筆者想借助傳統道教的養生思想給現代社會提供一些思考。
筆者將東亞道教飲食養生文化分為六個方面進行分析,分別用六本不同時期的著作作為各個時期的依據。 首先,最初以莊子為代表的道教思想家認為養生是一種修行,人的一生雖然短暫,但是知識是無窮的,莊子認為修行者追求長生不僅僅要注意飲食養生,還要具備關心這個世界的態度和追求自己內心的平靜,這樣才能實現長生。第二,東漢『太平經』中提出“重人貴生”的思想,認為人的生命同天地一樣重要,所以提出了養生和五臟、飲食的哲學等可以實現長壽的一系列觀點,即:五臟的健康與否取決於飲食是否乾淨,是否符合五臟的運行。第三,南朝『養性延命錄』提出很多與健康長壽有關的飲食禁忌,主張通過特定的飲食方法實現養生,其中道教養生者親自通過飲食節制進一步證明了飲食禁忌的合理性。第四,漢代『黃帝內經』的藥食同源思想反映了早起道教養生哲學,早起道教追求長生是通過服食藥物,包括礦石,金銀等有害物質,但經過幾千年的實踐慢慢用飲食取代服藥,主張飲食要符合陰陽變化,五臟與無味相對應,正確合理飲食就可以達到養生的目的。第五,唐代『千金方』提出食餌療法,通過飲食實現人身體的保養,通過服食藥物治療身體疾病,通過飲食排出身體內的邪氣,從而實現人體血液的正常循環,最後達到養生長壽的目的。第六,筆者通過以朝鮮後期『閨閤叢書』為代表的飲食養生書籍,發現該書的作者憑虛閣李氏與道教有非常深的淵源,該書中有許多關於飲食禁忌的內容與『黃帝內經』和『千金方』有相似之處,該書同樣注重飲食養生,是研究朝鮮後期生活文化的重要資料。總之,本文揭示了傳統道教思想與東亞飲食文化的關係。2023-01-01T00:00:00Z일본의 경제 외교와 ODA 제도의 형성
https://dspace.ewha.ac.kr/handle/2015.oak/265621
Title: 일본의 경제 외교와 ODA 제도의 형성
Ewha Authors: 한송이
Abstract: 본 논문의 목적은 일본의 ODA가 인프라 지원으로 대표되는 일본형 ODA라는 특수성을 발신하게 된 요인을 분석하는 것이다. 전후 일본은 소극적인 외교를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배상과 경제협력을 축으로 하는 경제 외교를 전개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 경제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경제 현실주의를 강조한 소위 ‘요시다 노선’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요시다 노선의 외교 방침과 경제 외교 정책을 매개한 배후는 무엇인가. 본 논문은 경제 외교의 추진을 시도하는 1950년대 중반에 다양한 정책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는 점과 경제 외교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ODA와 관련된 기관들이 설립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미국의 아시아에 대한 냉전 정책으로 제시된 미·일 경제협력을 통한 동남아시아 개발 구상은 동남아시아 국가의 반일 감정과 미국 의회 내에 원조 삭감론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는 일본이 주도하는 자국의 경제 부흥 및 자립과 동남아시아에 대한 개발을 추진할 수 있는 정책 환경을 조성했다. 요시다 시게루와 기시 노부스케의 동남아시아 개발 정책과 이케다 하야토의 본격적인 ODA의 추진에는 민관 협력이 전제되어 있다.
요시다는 유엔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와 콜롬보 플랜에 대한 가입으로 국제 무대에 성공적으로 복귀함과 동시에 동남아시아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민간 중심의 기술협력을 개시했다. 아시아경제간담회는 민간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요시다의 자문기구이다. 아시아경제간담회는 배상과 경제협력을 일체화하고 일본형 ODA의 특징인 ‘아시아 중심’, ‘경제 인프라 중심’, ‘구속성 원조 중심’의 세 가지를 형성했다. 그 과정에서 기술협력은 인프라 건설을 위한 안건의 탐색과 발굴의 개발 조사라는 수단적인 의미와 인프라 건설에 수반되는 사업적인 행위에 불과했다. 또한 아시아경제간담회는 일본 ODA 기관의 원형으로 준 제도적인 기구인 아시아협회를 설립하고 향후 일본 ODA 기관에 대한 구상을 제시했다.
기시는 요시다가 구축해 놓은 민관 네트워크를 수용하고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독자적인 정책 공간을 형성하고자 했다. 기시와 아시아문제조사회는 아시아 경제 외교의 효율적인 실행을 위해서 아시아 정책에 대한 지(知)를 결집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아시아경제연구소’를 제도화했다. 또한 기시와 자문기구인 경제외교간담회는 유럽경제공동체 출범에 대한 대항으로 ‘아시아개발기금’ 구상을 추진했다. 이 구상은 동남아시아 국가의 낮은 호응과 이를 근거로 삼은 미국 정부의 반대로 소멸되었다. 그러나 이 구상은 경제외교간담회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당초의 구상에서 굴절된 형태인‘해외경제협력기금’으로 제도화되었다. 이 기관은 배상의 역할을 엔 차관으로 대체하면서 일본 ODA의 행(行)을 수행하며 일본형 ODA 특징을 형성했다.
이케다는 1960년대 전후의 탈각을 모색하면서 국내외적으로 부여받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ODA와 관련된 기구들을 정비했다. 이케다는 안보 투쟁으로 저하된 국제적인 신용 회복과 일본의 이미지를 평화 국가로 창출하기 위해서 정부 주도의 기술협력을 추진하는 ‘해외기술협력사업단’을 발족했다. 또한 미국의 평화봉사단에 협력하며 국내 청년 문제에 대한 대책의 차원에서 ‘청년해외협력대’를 창설했다. 쿠보타 유타카가 설립한 ‘해외컨설팅기업협회’는 통산성과 해외기술협력사업단과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아시아경제간담회의 지속된 네트워크는 해외컨설팅기업협회와 해외기술협력사업단이 상호보완적인 관계에서 ODA의 행(行)을 수행하도록 했다.
아시아경제간담회가 구상했던 일본의 ODA 기관은 각각 실체가 부여되어 아시아경제연구소, 해외경제협력기금, 해외컨설팅기업협회로 제도화되었다. 일본의 ODA 기관을 탄생시킨 민관 네트워크들은 제도화를 위한 플랫폼으로서 기능을 담당했다. 제도화된 기관들은 아시아협회가 구축한 ODA의 원형을 계승하고 강화하여 인프라 중심의 일본형 ODA라는 특수성을 발신했다. 네트워크의 이슈를 구상하고 네트워크를 진화시킨 행위자들의 특성이 일본 ODA의 특징으로 반영된 결과이다. 현재 ‘경협인프라전략회의’와 ‘인프라 시스템 해외전개전략 2025 추진 간담회’는 민관이 통합 대응하여 인프라를 수출하는 공적 수단을 강화하고 있다. 일본 ODA의 현황과 향후 전개 방향에 대한 함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일본 ODA 기관의 변용에 대한 추가적인 분석이 요구된다.;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analyze the factors that caused Japanese ODA to be transmitted the unique characteristics of Japan-specific ODA represented by the support for infrastructure. After the end of World War II, Japan, in spite of their passive diplomacy at that time, was able to take the initiative of the Southeast Asian economy as it implemented the economic diplomacy focusing on both reparations and economic cooperation though it maintained passive diplomacy. This was in accordance with the so-called “Yoshida Doctrine” that emphasized economic realism. What is the background that mediated the foreign policy of the Yoshida Doctrine and economic foreign policy? This paper focuses on the fact that various policy networks were formed in the mid-1950s when economic diplomacy was being pursued, and that ODA-related organizations were established in the late 1950s and early 1960s when the full-fledged drive of the economic diplomacy were made.
The idea of Southeast Asian development through US-Japan economic cooperation, that was presented as the Cold War policy of the US toward Asia, was not realized due to the anti-Japanese sentiment in this region and the US congress's discussions on aid cuts. This created a policy environment which allowed Japan to proceed with its own economic revival, self-sufficiency and development in Southeast Asia initiated by Japan. Yoshida Shigeru and Kishi Nobusuke's Southeast Asia development policies and Ikeda Hayato’s promotion of full-fledged ODA were premised on private-public cooperation.
Yoshida successfully returned to the international stage by joining the UN Economic Commission for Asia and Far East and the Colombo Plan, and at the same time, began private-centered technical cooperation targeting Southeast Asian countries. ‘The Discussion Meeting of Asian Economy’ is Yoshida's advisory organization composed mainly of private sector people. The Discussion Meeting of Asian Economy unified the reparations and economic cooperation and formed the three characteristics of “Asia-centric”, “economic infrastructure-centric”, and “tied aid-centric”, which are the characteristics of the Japan-specific ODA. In the process, technical cooperation had a meaning just as a tool for development investigation on finding project for the infrastructure construction and was merely an business activities for the infrastructure construction. In addition, The Discussion Meeting of Asian Economy established the ‘Japan Asian Association’, a quasi-institutional organization as the prototype of Japanese ODA institutions, and proposed the ideas on the Japanese ODA institutions.
Kishi tried to form an independent policy space in the process of accepting and institutionalizing the private-public networks established by Yoshida. Kishi and the ‘Asia Kyokai’ institutionalized the ‘Institute of Developing Economies(IDE)’ as an institution that performs the function of collecting knowledge on Asian policies for the efficient implementation of Asian economic diplomacy. In addition, Kishi and the ‘Discussion Meeting of Economic Diplomacy’ pushed with an idea of “Asian Development Fund” confronting to the launch of European Economic Community. The idea was vanished due to low responses from Southeast Asian countries and the US opposition based on the reluctant responses. However, this idea was institutionalized to the ‘Overseas Economic Cooperation Fund’, a distorted form from the original idea, through the networks of the Discussion Meeting of Economic Diplomacy. The OECF replaced the role of reparations with Yen loans and formed the characteristics of Japanese ODA, by carrying out the activities of Japan’s ODA.
While seeking for a drastic change during the times in 1960s, Ikeda reorganized the ODA-related organizations to cope with the tasks given both internationally and domestically, seeking for a drastic change during the times in 1960s. To restore the international credit that was lowered by the national security struggle and the create Japanese image as a Peace country, Ikeda established the ‘Overseas Technical Cooperation Agency(OTCA)’ which will implement government-led technical cooperation. Also, Ikeda cooperated with the US Peace Corps and established the ‘Japan Overseas Cooperation Volunteers’ to cope with the domestic youth problem. The ‘Engineering and Consulting Firms Association(ECFA)’ established by Kubota Yutaka, expanded its business based on the network with the Ministry of Economy, Trade and Industry and the OTCA. The continued network of the ‘Discussion Meeting of Asian Economy’ allowed the ECFA and the OTCA to implement the ODA in a mutually complementary relationship.
Each of those Japanese ODA institutions envisioned by the Discussion Meeting of Asian Economy were substantialized and institutionalized into the IDE, OECF, ECFA. Those private-public networks which gave birth of the Japanese ODA institutions took the function as a platform for the institutionalization. Those institutionalized institutions succeeded and enhanced the prototype of the ODA established by the Japan Asia Association, and transmitted the unique characteristics of the infrastructure-centered Japanese ODA. This was resulted from the fact that the characteristics of the actors, who conceived the issues of the network and evolved the networks, were reflected to the Japanese ODA as the characteristics.
Currently, the ‘Economic Cooperation Infrastructure Strategy Meeting’ and the ‘Discussion Meeting of Infrastructure System Overseas Expansion Strategy 2025' are reinforcing public means to export the infrastructure through an integrated response from both the private and public sectors. Further analysis of the transformation of Japanese ODA institutions is required to provide implications on the current status and future development directions of the Japanese ODA.2023-01-01T00:00:00Z명대 붕우(朋友) 담론에서 본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交友論)』의 위치와 의미 연구
https://dspace.ewha.ac.kr/handle/2015.oak/264504
Title: 명대 붕우(朋友) 담론에서 본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交友論)』의 위치와 의미 연구
Ewha Authors: YAN, ZIMENG
Abstract: ‘붕우(朋友)’라는 단어는 중국의 역사 속에서 고대부터 다양한 형태로 논의되어 왔다. 특히 유교 사상의 대표적 인물인 공자와 맹자는 교우 및 붕우의 지위 등 친구와 관련된 내용에 대해 각자의 견해를 밝혔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그러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면 친구를 사귀는 것은 정치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친구 간의 교제는 밀접해졌으며 그 후에 각 왕조에서 유명한 사람들간의 교제가 일정한 규모를 이루었고 이는 결국 정치적 결사, 즉 붕당(朋黨)을 형성하였다. 같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같은 붕당을 이루었다. 대체적으로 이들은 ‘군자당’과 ‘소인당’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군자당과 소인당 간의 논쟁은 역대 왕조마다 있었다.
특히 명나라 시대에는 서원의 강학을 통해서 사상적 교류가 있었기에 같은 취향을 가진 학자들이 모여 학파를 형성하였다. 학파는 학문을 중시하는 것 외에 강학 과정에서 정치를 논하고, 나라를 위해 ‘악(惡)’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명대에도 붕당이 흥기하여 여러 붕당들이 당쟁을 벌였다.
붕당의 다툼은 날로 과격해졌다. 그 때 유럽에서는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면서 인문주의 정신이 고조되었다. 또한 종교개혁 이후 천주교회는 개신교로부터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였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중세신학을 비판하였고 천주교는 이에 대항하는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천주교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교회를 확장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서 선교하는 과정에서 빈번히 방해를 받았다. 그러던 중 1595년 우연한 기회에 난창에서 건안왕(建安王)을 알게 되었다. 건안왕은 서양에서 벗의 도리에 대해 어떻게 논하는지 알고 싶어 했고 마테오 리치는 『교우론』을 썼다.
『교우론』은 붕우를 중세 이래 유럽의 문화적 측면에서 재해석해서 그 의미를 새롭게 조망한 책이다. 마테오 리치의 목적은 선교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우에 관한 내용을 언급한 것은 명대 중국에 여러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뿐만 아니라 『교우론』은 서양의 여러 유명한 철학자들이 제시한 교우관을 중국의 붕우관(朋友觀)과 결합해서 썼다. 『교우론』의 창작 과정에서 리치는 명나라 양명학파(陽明學派) 학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교우론』이 완성되자 책에서 다룬 서양의 교우관은 명나라 학파에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은 명대 중국 문화에 역사적인 영향을 주고 동서양 문명 교류에 큰 역할을 했다.
;“朋友”這個詞從中國古代開始就一直被討論。 特別是儒教思想的代錶人物孔子和孟子對交友和朋友的地位等與朋友相關的內容闡述了各自的意見。在個人層面上交朋友是個人的選擇。從國家的角度來看,交友還包括了政治因素。朋友之間交往密切,此後各朝代名人之間交往形成一定規模,最終形成朋黨。具有相同目的的人被看作是相同的朋黨。大體上分為“君子黨”和“小人黨”。歴代朝代都有君子黨和小人黨之間的爭論。
特別在明朝,學者們通過書院的講學進行思想交流。因此具有相同誌嚮的學者們聚在一起形成了學派。學派除了重視學問之外,在講學過程中還討論政治,為國家除惡。於是學派也被稱作朋黨。朋黨興起,朋黨間展開了黨爭。
隨著中國朋黨之爭愈演愈烈。同時期,歐洲正處於文藝復興運動的階段,人文主義精神高漲。宗教改革以後天主教會面臨嚴重的挑戰。在西方,文藝復興運動的興起和宗教改革的批判了中世紀神學。天主教也探索了與之抗衡的新變化。耶穌會傳教士為了維持天主教勢力,在亞洲和非洲擴張教會而努力。利瑪竇在中國傳教過程中頻繁受到阻礙。1595年偶然的機會在南昌認識建安王。建安王想通過利瑪竇了解西方的交友觀。 由此,利瑪竇撰寫了《交友論》。
中世紀以來的《交友論》是從文化層面重新詮釋朋友的書。盡管利瑪竇的最終目的在於傳教,但這本書中提及有關交友的內容同樣有莫大的意義。不僅如此,《交友論》還結合了西方多位著名哲學家提出的交友觀結合中國的友觀創作而成。在創作《交友論》的過程中,深受明朝陽明學派學者的影響。而且《交友論》一書完成後,書中講述的西方交友觀對明朝學派也產生了影響。 因此《交友論》對明代中國文化產生了影響,對東西方文明交流起到了關鍵的作用。2023-01-01T00:00:00Z세 자녀 정책이 중국 직장여성에게 미치는 영향 조사 연구
https://dspace.ewha.ac.kr/handle/2015.oak/261734
Title: 세 자녀 정책이 중국 직장여성에게 미치는 영향 조사 연구
Ewha Authors: 고상
Abstract: 2021년 중국정부는 인구 고령화에 대응하고 인구의 장기적 균형 발전 촉진을 위해서 기존의 산아제한 정책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새로운 출산 정책인 '세 자녀 정책'이 제시되었다. 본 연구에서 필자는 중국의 직장여성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심층인터뷰를 통해서 세 자녀 정책에 대해서 직장여성들이 어떤 의견을 갖고 있고 어떤 반응을 취하고자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세 가지 연구 질문을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 첫 번째, 세 자녀 정책이 등장한 배경은 무엇인가? 기존의 산아제한 정책이 철폐되고 새로운 '세 자녀 정책'이 나오게 된 배경과 의미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두 번째, 세 자녀 정책은 과연 중국 여성들에게 출산 장려하는 기대효과를 낳을 것인가? 이 질문은 결국 여성들의 인구정책에 대한 반응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질적 연구방법인 심층인터뷰와 양적 연구방법인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분석할 것이다. 이러한 분석 결과를 토대로 필자는 중국정부의 새로운 인구정책이 기대한 효과를 얻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고 그 개선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양적 연구 방법과 질적 연구 방법을 모두 사용할 것이다. 먼저 양적 조사의 방법은 인터넷을 통한 무작위 설문조사방식을 택한다. 그리고 질적 연구방법을 통한 기본데이터는 1:1의 심층인터뷰로 얻어졌다.
설문조사와 심층인터뷰를 통해 도출해 낸 연구결과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세 자녀 정책의 실시 이후 가임기 여성의 출산 의향은 그 영향을 받고 있다. 반면 인터뷰 대상자 중 직장을 가진 기혼여성들의 경우, 모두 세 자녀 정책과 무관하게 더 이상 출산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직장여성들이 추가적인 출산이 경제적 안정감의 부족을 가중시킨다고 느끼고 출산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느끼기 때문이다. 둘째, 직장여성들은 임신과 출산을 할 경우 여러 곤란을 경험한다. 비국유기업(非國有企業)의 출산 여성들은 모두 직장 내 차별을 경험하였다. 특히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직장여성들에 대한 국유기업(國有企業)과 비국유기업의 대우는 더욱 커졌다. 그래서 공무원 시험 응시자가 계속 늘고 있다. 셋째, 중국의 많은 부부들은 가정과 개인 발전의 균형에 직면해 있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직장 때문에 출산을 미루거나 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성은 소득과 승진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출산휴가를 내지 않는다. 남녀가 함께 육아에 대한 책임을 분담하고, 가족을 위한 주부의 공헌을 사회적으로 인정해야만 새로운 정책이 효과를 얻을 것이다. 넷째, 여성의 출산을 위한 보장에 대한 기업의 차이가 있다. 세 자녀 정책 시행 이후, 여성의 취업 불평등 문제는 비국유기업(非國有企業)에서 두드러졌다. 여성들은 더 안정적인 직업을 찾기 시작하였지만, 비국유기업이 여직원에 대한 보장이 부족하면 많은 여성들의 출산 의지도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여직원의 보호정책을 통해서 세 자녀 정책을 뒷받침해야 한다. 다섯째, 중국 직장여성들은 자신의 권리에 대한 보호 의식이 약하다. 출산 정책을 알고 있으면서도 출산 보장에 관한 법률을 많이 알지 못했다. 법률 지식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이름을 들어본 차원에 그쳤다.
따라서 세 자녀 정책의 개선을 위한 방안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부차원의 직장여성 지원정책이 필요하다. 여성 자신의 의사를 무시하지 않고 여성의 낮은 교육 수준에 대해서 재고해야 한다. 박사 단계에서는 여학생과 남학생의 비율이 역전된 현상이 뚜렷이 드러났다. 또한 결혼과 출산이 중국 여성의 승진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는 가정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다. 중국의 인구수가 매우 크는 점을 고려하면 당분간 북유럽 국가들처럼 지원을 충분히 할 수는 없겠지만, 현재 지원이 너무 적다는 것도 사실이다. 둘째, 기업차원의 노력이다. 현재 중국 사회에 일부 기업은 여직원 출산휴가 기간 임금을 국가 규정에 따라서 주지 않았다. 기업은 국가의 여성 취업권익 보호 규정을 엄격히 적용해 여성 취업자를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 셋째, 가정차원의 노력이다. 가족 구성원은 여성이 가족과 일에 대해 분석하고 측정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가정 구성원들은 여성들에게 자유로운 선택 공간을 많이 주어야 하고 여성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출산과 취업을 할 수 있도록 한다. 넷째, 개인차원이다. 개인들 역시 출산으로 인한 여성의 금고를 풀고 여성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2021年,中國政府爲應對人口老齡化、促進人口長期均衡發展,對現有的計劃生育政策進行了大的改革。最終提出了新的生育政策,即三孩政策。在本篇論文中,筆者以中國的職場女性爲對象,通過問卷調查和深層訪談的方式,探討這一群體對三孩政策的看法和反應。
爲此將重點對這三個問題進行討論。第一,三孩政策出臺的背景是什麼?現有的計劃生育政策已被廢除,需要確認新出臺的三孩政策的背景和意義。第二,三孩政策究竟會給中國女性帶來鼓勵生育的預期效果嗎?這個問題歸根結底是詢問女性對人口政策的反應是什麼。爲了得到答案將實施深層採訪和問卷調查,並對此進行分析。以這樣的分析結果爲基礎,筆者想查明中國政府的新人口政策爲了取得期待的效果所需的部分是什麼,並提出改善方向。本研究將同時使用定量研究和定性研究。首先,定量研究的調查方法選擇通過網絡进行隨機問卷調查。其次,通過定量研究方法,從一對一的深層訪談中獲得基本數據。
通過問卷調查和深層訪談得出的研究結果概括如下。第一,實施三孩政策以後,育齡期女性的生育意向受到了影響。與之相反的是,在採訪對象中,有工作的已婚女性都表示與三孩政策無關沒有再生育的意向。最大的理由是職場女性認爲進行追加的生育加重了經濟安全感的不足, 對生育感到了經濟層面的壓力。第二,職場女性在懷孕和生育時經歷各種困難。非國有企業的生育女性都經歷過職場歧視。特別是受新冠的影響,國有企業和非國有企業對職場女性的待遇進一步拉大。因此,公務員考試的應試者不斷增加。第三,中國的很多夫婦都面臨着家庭和個人發展的均衡。大部分女性回答道不會因爲工作而推遲或者不生育。但大部分男性因為陪产假會影響收入和晉升,不會主動申請休假。然而只有男女共同分擔育兒責任,且在社會上承認主婦爲家庭做出的貢獻,新政策才能取得效果。第四,企業對女性生育保障存在差異。三孩政策實施以後,女性的就業不平等問題在非國有企業中尤爲突出。雖然女性開始尋找更穩定的職業,但如果非國有企業對女員工的保障不足的話,許多女性的生育意願不會得到提高。因此,政府應該通過对女職員的保護政策來支持三孩政策。第五,中國職場女性對自己權利的保護意識較弱。雖然知道生育政策,但並沒有深入了解有關生育保障的法律。對於法律知識的了解程度僅僅停留在表面。
因此要概括為了改善三孩政策的方案的話,有以下幾點。第一,需要政府層面的對職場女性支援政策。不無視女性自身的意願,且要提高女性的低教育水平。在博士階段,女學生和男學生的比率發生逆轉的現象非常明顯。另外,結婚和生育不能成為中國女性晉升的攔路虎。其次是對養育孩子的家庭給予經濟上的支援。考慮到中國人口數量非常大,短期內不可能像北歐國家那樣充分提供支援,但目前給予的支援太少是不爭的事實。第二,企業層面的努力。目前中國社會的部分企業並沒有按照國家規定支付女職工產假期間的工資。企業應嚴格執行國家採取的女性就業權益保護規定,公平地對待女性就業者。第三,家庭層面的努力。家庭成員應幫助女性對家庭和工作進行分析和測量。家庭成員應該給予女性更多的自由選擇空間,讓女性可以按照自己想要的方向選擇生育和就業。第四是個人層面。女性個人也需要打破由生育帶來的禁錮,努力提高自身的能力。2022-01-01T00:00:00Z